노비제도가 있던 조선시대, 증손자를 본 어느 할아버지 얘기다. 손자 내외는 일 때문에 한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생후 6개월 된 아이를 둔 손주며느리가 또 임신이 되어 젖이 부족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 걱정에 손자 내외는 본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전에 출산한 노비를 유모로 청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급히 손자에게 편지를 썼다.
“젖먹이 딸린 여종을 유모로 데려간다니 안 될 일이다.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아니냐. ‘남의 자식을 죽여 제 자식을 살리는 것’이니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럼 어찌해야겠느냐. 우선 대여섯 달 동안 젖을 함께 먹여 키울 이를 찾아보고, 이곳 여종의 아이가 죽이라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데려가도 될 것이다. 그리한다면 두 아이 모두 살 수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기어이 한양으로 불러들여야겠다면 차라리 여종의 아이까지 데려가거라. 그래서 여종이 두 아이에게 함께 젖을 먹이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고 여기에 아이를 두고 어미만 가게 하는 것은 어진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마음이 몹시 불편하구나. 다시 생각해 보아라.”
할아버지의 이 단호한 말씀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들 걱정에 유모를 청한 것인데, 할아버지께 ‘어진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불호령을 들었으니 이 한 말씀에 손자는 얼마나 뜨끔했을까.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때때로 생각나는 이 편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장손 이안도(李安道·1541~1584)에게 보낸 글로 《퇴계문집》에 전하며, 대대로 회자되는 유명한 얘기다. 문득 이 편지의 뒷일이 궁금해 좀 더 알아봤다. 내심 ‘여종과 아이를 함께 한양으로 보내어 두 아이를 모두 잘 키웠다더라’라는 훈훈한 해피엔딩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퇴계가 68세 때 태어난 증손자 창양은 엄마 젖이 부족한 탓인지 병치레가 잦았다. 방편의 하나로 유모를 청했던 것인데, 퇴계의 생각은 달랐다. ‘남의 자식을 죽이며 내 자식을 살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약을 지어 보내는 등 다른 방법을 찾아봤지만, 결국 증손자는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증손자의 요절 소식에 비통한 심정을 담은 또 다른 퇴계의 편지에서 전후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아들을 잃은 손자 내외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그때 노비를 유모로 보내주었더라면…’이라는 하소연이 없었을까만, 그런 생각은 결코 드러내지 못하는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인정상 그리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최근 세상을 분노에 떨게 한 ‘정인이’ 양부모의 소행과 어린 생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겪은 일들을 살펴보며 참담함과 안쓰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정인아 미안해’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법과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의 목소리, 개선안을 찾아보겠다는 당국의 입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듯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얼마 안 가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비슷한 일들은 또 일어날 것이라는 회의론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차마 하지 못할 일’ ‘인정상 그리하지 못할 일’이라는 경각심을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이번 움직임은 좀 더 오래, 제대로 이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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