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과 위선의 정치가 민주주의 파괴”
  •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1.19 08:00
  • 호수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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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내란선동 세력과 한국의 ‘팬덤정치’ 비교

2021년 1월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불복을 지지하는 극렬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814년 8월 워싱턴을 점령한 영국군이 의사당에 불을 지른 지 약 200년 만의 일이다. 세계 언론들은 충격 속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추락을 탄식한다.

이번 사건은 미국 대선에서 포퓰리스트인 트럼프 대신 온건한 의회민주주의자인 바이든을 선택해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미국 유권자들의 민심을 거역하고 찬물을 끼얹는 ‘반동적 행위’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바이든의 온건주의 노선도 타격을 받아 온건파보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나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를 추구하는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들이 득세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사태는 240년 전통의 선진적 민주공화국도 포퓰리스트와 팬덤정치를 견제하지 못할 경우 치명적으로 망가질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포퓰리스트와 팬덤정치가 결합한 한국의 이른바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대통령 지지파), 대깨명(대가리가 깨져도 이재명 지사 지지파), 태극기부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9년에는 조국 법무부 장관을 놓고 서초동파와 광화문파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분열했다. 지난해는 추미애-윤석열 갈등을 놓고 지지자 집단 간에 충돌했다. 올해 1월6일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서 벌어진 이낙연 지지자들과 이재명 지지자들의 설전은 미국 의사당 난입 사건을 닮았다. 미국 의회 난입 사건보다 앞선 2019년 12월16일 ‘태극기부대’의 국회 난입 사건도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20년 9월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윈스턴 세일럼에 있는 스미스 레이놀즈 공항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AP 연합
2020년 9월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윈스턴 세일럼에 있는 스미스 레이놀즈 공항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AP 연합

‘폐쇄적인 소셜미디어 탐닉자들’이 미 의회 난입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포퓰리즘, 고립주의, 미국 우선주의, 백인주의 등을 앞세우는 트럼프의 노선인 ‘트럼피즘’과 트럼피즘을 확산하는 유트브 매체인 ‘큐어넌’ 그리고 트럼피즘을 잉태시켰던 힐러리 클린턴의 ‘PC주의’를 핵심적 원인으로 꼽고 있다.

큐어넌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해인 2017년 말부터 극우 성향의 온라인 게시판 ‘포챈(4chan)’에서 ‘Q’라는 닉네임이 퍼뜨리기 시작한 음모론 혹은 이를 추종하는 집단이다. 르네 디레스타 스탠퍼드인터넷연구소 연구원은 1월 6일 뉴욕타임스에 “폐쇄적인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이번 난입 사태를 벌였다”며 “이 사태는 온라인상의 집단극단화에 따른 반향실효과(echo chamber effect)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트럼피즘이 득세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여러 전문가는 PC주의를 앞세우는 ‘정체성의 정치’를 꼽고 있다. PC주의는 편견이 섞인 언어적 표현을 쓰지 말자는 사회적 운동으로 출신, 인종, 성,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장애, 종교, 직업, 나이 등을 기반으로 한 언어적·비언어적 모욕과 차별을 지양하면서 사회 정의를 ‘정체성의 정치’에서 찾고자 한다.

PC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장 크게 표출한 정치인은 당연히 트럼프였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트럼프의 반(反)PC 운동이 주요하게 먹혔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PC주의에 대한 공격을 정치적 무기로 삼은 지는 오래되었다.

트럼프는 2015년 공화당 대선 경선 토론에서 “정치적 올바름(PC)이 나라를 죽이고 있다” “무슬림 테러 용의자들을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는 건 오바마의 PC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공격하면서 지지율을 높였다. 트럼프는 ‘증오 범죄’에 속하는 이런 반(反)PC 선동이 미국 수정헌법 1조에 명기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당화했다.

라틴계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백인의 다수적 위치가 하락하는 흐름도 ‘정체성의 정치’를 낳은 배경이다. 인종적 및 종교적 기반이 집단주의적 당파성과 결합한다. 민주당은 소수인종과 이민자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갖는다. 반대로 공화당은 이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대선 당시 일관되게 ‘정체성 정치’라는 선거전략을 앞세웠다. 그는 자신을 ‘마지막 유리천장을 깰 사람’이라 칭하며 페미니스트로서의 입지를 강조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역대 최악의 성차별주의자 후보인 트럼프와 맞붙었지만, 여성 지지율은 54%밖에 얻지 못했다. 이와 같은 대선 결과를 두고 미국 내에서 ‘정체성 정치’는 이미 진보적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시종일관 ‘정체성 정치’를 내세워온 자유주의 세력이 소수자와 이민자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PC주의자들의 도덕적 이상주의가 오히려 기득권의 위선주의’라는 역풍을 초래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했던 오바마는, 유색인들의 삶의 조건을 거의 향상시키지 못했다. 오바마는 긴축 재정을 실시해 복지예산을 삭감하고, 그 돈으로 구제금융 자금을 마련해 금융 자본가들을 공황에서 구출해 주었는데, 이는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해 있는 다수 흑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민주당 성향의 학자 마크 릴라는 뉴욕타임스(2016년 11월18일)에 ‘정체성 자유주의의 종말(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정체정의 정치’를 비판했다. 그는 정체성 담론이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다양성의 문제가 정치 담론을 모두 포괄한다’고 여기게 만든 한편, ‘계급·전쟁·공공선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팬덤형 집단주의, 다수파 독재나 전체주의로 흘러

이런 ‘정체성의 정치’는 도덕적이고 이상주의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흑인·여성·성소수자 등 소수자 집단 내에도 계급적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사회현상으로 치부하거나 백인 노동자계급을 투쟁에서 배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집단주의 정체성에서는 개체의 고유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나 자유규범이 무시되고 집단 내부의 결집을 위해 집단 밖의 가상의 적을 만들어 차별하고 증오할 수밖에 없다.  

이런 미국의 PC주의, 정체성의 정치, 트럼피즘은 한국의 대깨문, 대깨명, 태극기부대의 정체성과 닮았다. 그 유사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집단주의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주의 정체성은 1835년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 정치가인 토크빌이 통찰했던 선진민주주의 모국으로서의 미국 시민의 정체성과 다르다.

토크빌은 선거민주주의에서 우려되는 다수결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을 막을 수 있는 방파제로 미국 시민들이 지닌 ‘자유로운 개인주의 습속’을 들었다. 그는 자유로운 습속의 개인들이 타운미팅, 시민결사체, 배심원제 등을 통해 공공선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토크빌이 찬양했던 ‘개인주의 습속의 공론장’은 오늘날 집단주의를 키우는 유튜브, SNS, 팟캐스트, 진영논리에 물든 언론과 정당의 지지층 결집 전략 등으로 무너지고 있다.

집단주의적인 ‘적과 동지의 정치’는 현대 민주공화주의의 규범인 자유와 경쟁, 협력과 공공선과 충돌한다. 집단주의는 결국 다수파 독재나 전체주의로 흘러갈 공산이 크다. 다수결 민주주의의 폐해는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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