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피해자다움'은 깨졌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21.01.29 12:00
  • 호수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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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맞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장혜영 입장문’ ‘박원순 인권위 보고서’에 담긴 성폭력 사건 가이드라인

3653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입장문’은 읽히고 또 읽혔다. 1월25일 그는 같은 당 김종철 대표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스스로 ‘일상 깨기’를 택했다. 피해 사실과 함께 눌러 쓴 장 의원의 글은 정확히 3년 전 시작된 ‘미투’ 운동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여전히 ‘피해자다움’ ‘가해자다움’을 섣불리 정의하고, 국회의원 신분의 피해자조차 피해 사실을 알리기 두려울 만큼 2차 가해가 만연한 것이 글이 전한 우리의 현실이었다.

경험을 담은 메시지는 힘이 셌다. 피해를 겪은 후의 깨달음을 전한 장 의원의 문장, 문장은 화두가 됐다. 미투에 관한 논쟁적 단어 ‘피해자다움’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단연 주목을 받았다. 그는 “피해자는 어떤 모습으로나 존재할 수 있다”며 피해자다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자신 역시 사건 발생 후부터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때문에 사람들도 피해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증언을 덧붙였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시사저널 이종현

정의당은 했고, 민주당은 하지 못했다

대중은 장혜영 입장문을 통해 자연스레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을 떠올렸다. 정치권에서도 곧장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박 전 시장 사건에서 민주당이 보여온 태도와 이번의 정의당 건을 대조했다. 박 전 시장의 피해자에게 줄곧 피해자다움을 강요한 민주당과 일부 지지층을 향해 비판이 가해졌다. “4년을 참았다가 왜 이제 밝히는지 궁금하다” “떳떳하면 얼굴 공개하고 나오라” “피고소인(박원순)의 인생은 끝났는데, 고소인(피해자)은 숨어 있다”. 박 전 시장 사망 이후 피해자가 들어야 했던 말들이다. 피해자의 편지와 실명이 공개된 후 피해자를 부정하는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피해자다움’은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가 선고된 1심 재판 과정에서 언급되면서 뜨거운 화두가 됐다.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2심과 대법원에서는 유죄 인정)와, 당시에도 침묵한 민주당에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배복주 정의당 상임대표는 “재판부는 피해자가 왜 자신의 직업과 목숨을 걸고 거절하지 않았느냐고 문제 삼고 있는 거다.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어야만 위력인가”라고 비판한 바 있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이후 가해자와 접촉하지 않는다는 건 일반적인 강간 신화다.” 전 세계 미투의 시발점이 된 하비 와인스타인 미국 할리우드 제작자의 성폭력 재판에 출석했던 법의학자 바버라 지브 박사의 증언이었다. 1000여 명의 성범죄 가해자와 그 이상의 피해자들을 면담한 연구 결과다. 지브는 “강간의 85%가 알고 지낸 사람에 의해 행해지며 일반적으로 가해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면서 “피해자들은 보통 가해자와 연락도 계속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평소 친밀한 연락 내용을 보여주며 재판을 유리하게 만들려 한 와인스타인 변호인단의 계획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와인스타인은 지난해 징역 23년형을 최종 선고받았다.

장 의원의 입장문이 공개된 날, 마침 박원순 전 시장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결과보고도 발표됐다. 보고서엔 박 전 시장의 성희롱 사실과 함께 “서울시는 피해자 보호 및 지원이 전무했고, 피해자가 조사 요구와 2차 피해에 대한 조치를 요청했음에도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적혔다. 그보다 앞선 1월14일 법원 판결문에도 “피해자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으로 인하여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며 성폭력 사실을 적시했다. 박 전 시장 사망 이후 6개월 만이다. 피해자 측 김재련 변호사는 이 같은 결과에 의미를 두면서도, 과정이 불필요하게 험난했던 것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번 정의당 사건과 가장 큰 차이가 드러난 지점은 바로 ‘시간’이다. 정의당은 1월15일 피해가 발생한 후 열흘 만에 비공개 조사를 마치고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당 차원의 입장문을 발표하며 사건을 명확히 규정했다. 정의당은 모든 의견이 정리된 후 사건을 공개했다. 갖가지 왜곡과 2차 가해가 이뤄질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차단했다. 사건의 정리자인 정의당은 조치가 길어지는 만큼 피해자의 고통은 커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다. 그만큼 피해자의 피해 무게를 엄중히 본 것이다. 발표에서 구체적인 피해 내용과 가해자의 음주 여부 등을 언급하지 않은 것 역시 사건의 본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시스템은 다행히도 작동했다. 장 의원이 입장문에서 밝힌 “설령 가해자가 당 대표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당 대표이기에 더더욱 정의당이 단호한 무관용의 태도로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은 지켜졌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에게 각각 ‘피해호소인’ ‘피해고소인’으로 칭했던 민주당 남인순 의원(왼쪽)과 이낙연 대표는 인권위원회 조사 결과 발표 후 사과했다.ⓒ시사저널 박은숙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에게 각각 ‘피해호소인’ ‘피해고소인’으로 칭했던 민주당 남인순 의원(왼쪽)과 이낙연 대표는 인권위원회 조사 결과 발표 후 사과했다.ⓒ시사저널 박은숙

가해자의 역할, 사실 인정→사죄→책임

전문가들은 폭력에 대한 책임자의 모호한 교통정리부터가 2차 가해의 시작으로 본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한 후 책임의 핵심 당사자인 민주당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를 피해자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를 향한 모호한 시선은 ‘피해호소인’ ‘피해고소인’이란 새로운 단어를 양산했다. 6개월 후 인권위의 결과가 나오고서야 위 단어를 만든 남인순 민주당 의원과 이낙연 대표 등은 비로소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며 사과를 표했다. 그러나 지금도 2차 가해가 계속되고 있으며 ‘뒷북 사과’를 한 이들의 책임론은 여전히 크다.

물론 신속한 대응을 가능케 한 바탕엔 ‘가해자의 존재함’과 ‘확실한 인정’이 있었다. 이는 박원순 사건과 이번 정의당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자, 두 사건의 대응 방식을 온전히 나란히 두고 대조할 수 없는 요인이기도 하다. 김종철 전 대표의 입장문엔 여느 성폭력 가해자가 보여온 사과에 앞선 변명과 회피가 없었다. “성추행의 가해를 저질렀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등 명확한 워딩으로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당에 자신을 제소하는 등 스스로 세 가지 징계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불필요한 사실관계 다툼을 만들어 피해자의 피해가 불어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정의당 역시 친분이나 존재감, 평판 등을 바탕으로 가해자를 판단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가혹했던 분” “맑은 사람”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는 사람” 등 가해자 동정론은 애초에 차단될 수 있었다.

가해자의 사과를 받은 장 의원은 사실관계를 따지느라 개인의 분노에 갇히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가해자의 사죄로 “분노하기보다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고 입장문에 적었다. 그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더욱 힘을 실었다.

장 의원은 사건 발생 후 약 2주간 예정된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당에 상황을 전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한 차례 공개 입장문을 낸 후 장 의원은 더 이상 어느 곳을 통해 어느 방식으로도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취재진의 개별적인 인터뷰 요청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SNS를 통해 자신의 추가적인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전했다. 보수 시민단체가 김종철 전 대표를 고발하고 나서자, 장 의원은 1월26일 SNS에 유감을 표시하는 입장문을 추가로 올렸다. 장 의원의 입장에 힘을 싣는 일부 전문가의 글도 몇 차례 공유했다. 당 쇄신을 위해 구성된 비상대책회의에 기존 지도부들과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장 의원의 글엔 가해자와 가해자가 속한 조직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담겼다. 그는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해자가 반드시 취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사실 인정과 진정성 있는 사죄, 그리고 책임을 지는 절차. 정의당 사건에선 지켜졌고, 박 시장 사건에선 그의 사망으로 하나도 충족되지 못한 것들이었다.

1월26일 의원총회에서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왼쪽)가 성추행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심상정 의원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1월26일 의원총회에서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왼쪽)가 성추행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심상정 의원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이제 질문은 피해자 아닌 사회의 몫이다

장 의원은 가해자가 세 가지를 거부할 경우 조직이, 사회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 역시 이번 박 전 시장 관련 조사 보고서에서 조직의, 시스템의 역할을 강조했다. 당장 서울시에 피해자 보호가 최우선시되는 행동수칙 마련을 권고했다.

장 의원의 당부와 인권위의 권고는 과연 지켜질까. 장 의원의 글 속엔 앞으로의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조직이, 사회가 취해야 할 여러 가지 답이 담겼다. 그러나 여전히 풀지 못한 질문도 하나 남겼다.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점을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 벌어진 후에 행해야 할 정답이 아닌, 애초에 벌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질문은 대부분 피해자의 몫이었다. “내가 뭘 했지?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뭘 입었지? 내가 돈을 노렸다고 소문이 날까? 내가 ‘관종’이라고 하진 않을까?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까? 여기 남는다면 참고 견뎌야 할까? 다음 직장은 다를까? 아니면 내가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폭스뉴스 공동설립자 로저 에일스 전 회장의 성희롱 행태를 다룬 영화 《밤쉘》에 나온 대사다. 성폭력은 피해자를 끊임없는 자문의 늪에 빠뜨린다고 영화는 얘기한다.

장 의원의 입장문과 인권위의 보고서에선 더 이상 사건을 둘러싼 질문들이 피해자로 향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장 의원은 질문은 사회의 몫이며 “반드시 직시해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의당과 박원순 두 사건을 비롯해 최근 몇 년, 몇 가지 사건을 직시해 온 우리는 이미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알고 있다. 장 의원이 입장문에서 12차례 강조한 ‘존엄’을 지키는 일은 이제 논쟁의 영역이 아닌 의지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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