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미나리》는 조미료 안 친 담백하고 순수한 작품”
  • 하은정 우먼센스 대중문화 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10 14:00
  • 호수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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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역할로 월드스타 등극한 배우 윤여정

윤여정이라는 배우에게는 영역이 없다. 영화와 드라마, 예능 등 모든 영역에서 사랑받는 70대 여배우다. 즉, 윤여정이 곧 장르라는 의미다. 이토록 복받은 배우가 있을까. 그는 《윤식당》을 운영하며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로 10대들에게까지 사랑받고 있으며, 최근엔 영화 《미나리》로 월드스타가 됐다. 그것도 감독이 좋아 출연한 ‘인디영화’로 말이다. 스스로도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라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일이다. 현재 《미나리》는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 각종 시상식에서 75관왕을 수상했다.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한국 이민자 가족의 미국 정착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윤여정은 극 중 딸 모니카(한예리 분)와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 분)의 부탁으로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할머니 ‘순자’ 역할을 맡았다.

연출을 맡은 정이삭 감독은 “이 영화가 많은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결국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충에 대해 공감하는 것 같다”며 “특히 모든 배우가 열린 마음으로 역할을 소화했다. 인간애가 보이는 연기를 한 것이 이 영화가 큰 사랑을 받은 비결”이라고 말했다. 극 중 윤여정은 영어를 하지 못해 빚어지는 어린 손주와의 미묘한 갈등을 실감 나게 표현하며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배우 윤여정의 55년 연기 인생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평범하지 않은 할머니 캐릭터를 완성했다”고 극찬했다. 최근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윤여정을 만났다.

ⓒ판씨네마㈜ 제공 

영화 《미나리》가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감이 궁금하다.

“현재 미국 OTT 드라마 《파친코》 촬영차 캐나다 밴쿠버에 와 있다. 《미나리》를 국내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우리는 식구처럼 소소하게 적은 예산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렇게 큰 사랑은 생각도 못 했고 기대도 안 했다. 애초엔 반응이 따라줘서 좋았는데 지금은 걱정스럽고 떨리는 마음이 더 크다. 실망할까봐 그런 것 같다(웃음).”

말씀하신 대로 스태프들과 끈끈한 가족애가 있었다고 들었다.

“다들 내 걱정을 많이 했다. 해외에서 촬영하는 영화라 혹여 내가 음식을 잘 못 먹으면 어쩌나 싶은 걱정들 말이다. 그래서 쫓아온 후배도 있었다. 덕분에 집밥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영화 번역가 친구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어떻게 찍나 보기 위해 왔다가 눌러 앉아서 많은 일을 도와줬다. 이 모든 것이 정이삭 감독의 힘이다. 다들 정 감독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들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똘똘 뭉쳐 만든 영화다. 우리는 얼굴을 보여주면서 영광을 누리지만 사실 앞에서 언급한 두 친구는 그렇지 않다. 뒤에서 수고해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배우로서도 《미나리》만으로 현재 27관왕이다. 기분이 어떤가?

“감사하다. 사실 상패를 직접 받은 게 적어 실감을 못 하고 있다. 내가 할리우드 배우가 아니라 이런 경험이 적다. 나라가 넓어서 상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순자’ 캐릭터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다. 전형적이지 않은 할머니를 연기하기 위해 어떤 것에 중점을 뒀나.

“결국 정 감독이 전형적이지 않게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감독의 역량이다. 사실 어떤 감독들은 배우에게 ‘이렇게 해 주세요’ 하고 요구하며 배우를 가둬둔다. 처음에 정 감독에게 ‘정해진 게 있느냐’ ‘어떤 제스처를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감독이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하는 거다. 마음속으로 에이플러스 점수를 줬다(웃음). 내게 자유를 주지 않았나. 결국 감독과 내가 만든 캐릭터다.”

자신의 의사가 반영된 장면이 있나.

“감독이 내가 보고 들었던 걸 언제든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경험들을 다 나눴다. 실제로 내가 미국에서 살 때 친구의 남편이 손자에게 밤을 깨물어서 먹여주는 걸 봤다. 내가 본 걸 얘기했더니 반영됐다. 극 중 침대 장면도 그렇다. 할머니가 바닥에서 자는 장면인데, 귀한 손자가 아픈데 할머니가 침대에 나란히 자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감독이 바로 세트를 바꾸더라. 또 대사 중 ‘원더풀’ 미나리가 있는데, 영어 표현에서 ‘원더풀’은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영어 아닌가 싶어서 의견을 냈다. 생각해 보니 반영된 장면이 많다(웃음).”

촬영 당시 더위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길 들었다.

“촬영이 동시녹음이라 혹여 소음이 들릴까봐 에어컨을 꺼야 했다. 그 더위의 고통을 잊게 해 준 건 숙소에 가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밥에 집착하는 것 같아 죄송하다(웃음). 일할 때는 열심히 한다. 여하튼 맛있는 밥 생각에 참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미나리》는 ‘윤여정’의 연기 인생에서 어떤 작품인지도 궁금하다.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해 준, 놀라움을 준 작품이다. 촬영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임했고, 일을 빨리 끝내고 시원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한데 선댄스영화제에서 사람들이 우리 영화를 너무 좋아해 줘서 놀랐다. 덧붙이자면 처음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즐기지 못했다. ‘부족한 게 뭐가 있지?’ ‘내가 뭘 잘못했지?’ 하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 울고 있는 거다. 그래서 왜 우냐고 했더니 ‘선생님만 안 운다’고 하더라. 정 감독이 무대로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때 나도 눈물이 나더라. 나는 나이가 많은 노배우다. 젊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을 볼 때 장하다.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면 애국심이 폭발한다.”

영화 《미나리》를 찍으면서 가장 원더풀했던 시간은 언제인가?

“내가 다른 배우들보다 촬영을 며칠 빨리 끝냈다. 한데 정 감독이 배우들을 다 데리고 숙소에 와서 큰절을 하는 게 아닌가. 사진을 찍어놔야 했는데 기록이 없어서 아쉽다. 그 순간이 참 놀랍고도 좋았다. 다들 촬영하느라 힘들 텐데 정 감독의 배려심이 돋보였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조미료가 없는 담백하고 순수한 맛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 한국 사람 취향을 잘 알지 않나. 양념이 센 음식을 많이 먹어 우리 밥을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건강한 밥이니 한번 잡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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