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를 탈출해야 이강인도 산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21 12:00
  • 호수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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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둬둔 구단과 안쓰는 감독의 엇박자 행보에 선수 사기는 바닥

3월13일(한국시간) 열린 2020~21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27라운드. 발렌시아는 같은 지역을 연고로 하는 레반테와 더비를 펼쳤다. 선발 출전한 이강인은 전반적으로 답답한 경기를 펼치는 발렌시아에서 유일하게 창의적인 플레이로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하비 그라시아 감독은 0대1로 뒤진 후반 17분 첫 번째 교체 멤버로 이강인을 택했다. 

그라시아 감독의 교체 카드에도 경기는 뒤집어지지 않았고 발렌시아는 그대로 패했다. 리그 12위의 부진한 성적에도 반등은 오지 않았다. 더비 라이벌이자 만년 하위권 팀인 레반테가 승점 5점 차로 앞선 9위를 기록하고 있어 발렌시아 팬들의 자존심엔 또 한 번 금이 갔다. 

1월27일 스페인 국왕컵 16강전에서 세비야에 패한 발렌시아의 이강인이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뉴시스
1월27일 스페인 국왕컵 16강전에서 세비야에 패한 발렌시아의 이강인이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뉴시스

현지 언론 “가장 위협적인 선수가 가장 먼저 교체돼” 비판 

이 패배의 파장은 컸다. 특히 그라시아 감독의 전술과 교체술에 대한 현지 언론들의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엘데스마르케’는 “2개월 만에 갑자기 스리백 수비 전술을 쓴 그라시아 감독의 전술적 실패였다. 그나마 가장 잘하고 있던 이강인이 첫 번째로 그라운드를 빠져나왔다.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인 선수가 나오고 대신 들어간 선수들은 아무 역할을 못 했다”고 보도했다. ‘스포르트’는 “이강인은 공격에서 가장 위협적인 장면을 만든 선수였는데도 가장 먼저 교체됐다. 실망하고 있는 사진만 봐도 가슴이 아프다”고 전했다.

마누 바예호와 교체돼 그라운드를 나와 벤치에 앉은 이강인은 한참 동안 얼굴을 수건으로 감싸며 고개를 떨궜다. 올 시즌 내내 이어지는 그라시아 감독의 불신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이강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정용 서울이랜드 감독은 “힘든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버텨야 한다”며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강인에 대한 팀 외부의 평가는 일관적이다. 현재 팀에서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는 몇 안 되는 선수고, 경기에 나설 때마다 제 몫을 해 줬지만 그만큼의 출전 시간을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 올 시즌 이강인은 리그에서 단 2차례 풀타임 출전을 기록했다. 

실제로 지난 24라운드 비야레알전에서 첫 풀타임 기회를 받았을 때 결승골을 도운 것을 포함해 경기 MOM(Man of the match)에 뽑혔다. 그러나 그라시아 감독은 그다음 헤타페전만 풀타임 기회를 줬을 뿐이다. 후반기 반등의 분위기를 만든 것도 이강인이었다. 2021년 팀이 첫 승을 거둔 에클라노와의 스페인 국왕컵에서 선제골을 기록했고, 그 기세로 발렌시아는 홈에서 착실하게 승리하며 리그 순위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올 시즌 이강인은 선발 출전 기회를 얻어도 대부분 후반 20분을 전후해 첫 번째로 교체돼 나왔다. 문제는 이런 선수 교체 패턴이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라시아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급기야 레반테전 패배 후에는 경질설도 불거졌다. ‘수페르데포르테’는 “그라시아 감독의 계약기간은 2022년 6월까지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경질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올 시즌 발렌시아는 리그에서 연승이 단 한 차례도 없을 정도로 경기력 기복이 심하다. 즉흥적인 전술 교체와 실속 없는 선수 교체로 팀 내부의 신임 역시 바닥을 치고 있다. “그라시아 감독의 전술적인 결정에 대해 선수들이 이해를 못 하고 있다. 지난 레반테전을 기점으로 그라시아 감독은 선수들의 신임을 크게 잃은 것으로 보인다”는 게 ‘수페르데포르테’의 추가 설명이었다. 

지난 시즌 리그 9위에 그치며 유럽클럽대항전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발렌시아는 리빌딩을 외치며 이번 시즌에 돌입했다. 다수의 베테랑 선수와 작별했고, 발렌시아 유스가 키워낸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 개편을 진행하겠다며 적임자로 그라시아 감독을 선임했다. 당초 젊은 선수들을 활용하는 데 적극적인 성향이라는 판단에 지휘봉을 맡긴 그라시아 감독이지만 실제로는 그 큰 그림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발렌시아는 팀 재건도, 이강인도 모두 놓칠 위기에 처했다. 이강인과 발렌시아의 현재 계약은 2022년 6월로 종료된다. 발렌시아는 지난 2년 동안 떠나고 싶다던 이강인을 장기 계약을 이유로 억지로 붙잡았다. 2019년 FIFA(국제축구연맹)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골든볼(MVP)을 차지하며 발렌시아 유스 시스템의 성공을 알린 아이콘을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동시에 싱가포르 국적의 재벌인 구단주 피터림의 아시아 마케팅 꿈을 실현할 중요한 선수였다. 

이강인은 한창 뛰어야 하는 때임을 강조하며 임대라도 보내줄 것을요청했다. 스페인을 비롯해 잉글랜드·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 1부 리그의 많은 팀들이 이강인 임대에 관심을 보였다. 2019년 여름에 발렌시아가 선수의 성장을 위한 임대를 선택했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임대를 반대하며 선수를 팀에 묶어둠으로써 감독이 구단의 뜻대로 중용하지 않아 선수 사기마저 떨어지는 결과만 낳았다. 창살 없는 감옥이 된 것이다. 

1월27일 스페인 국왕컵 16강전에서 세비야에 패한 발렌시아의 이강인이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뉴시스
3월13일 발렌시아와 레반테의 경기에서 교체된 이강인이 그라시아 감독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벤치로 들어가고 있다. ⓒ유튜브 캡쳐

내년 6월 계약 종료 앞두고 재계약 협상 침묵…올여름 떠날 듯

결국 이강인은 발렌시아의 그런 대처에 대해 불신만 커졌고, 재계약을 거부해 왔다. 이강인은 유럽 축구계의 선수 이적 권리 보호 판결인 ‘보스만룰’에 의거해 기존 계약 만료 6개월 전부터 새로운 팀과의 교섭이 가능하다. 발렌시아가 이강인을 다른 팀에 보내 이적료를 건질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오는 6월이라는 뜻이다. 여전히 재계약 의사가 없는 이강인 측은 당장 3개월 뒤라도 이적료를 지불하고 안정적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겠다는 분위기다. 

이강인과의 오랜 동행이 최악의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며 발렌시아도 대비에 나서는 모습이다. ‘엘골’은 “발렌시아가 기대에 못 미친 이강인을 올여름 이적시키고, 대체자로 바야돌리드의 미드필더 오스카 플라노를 노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플라노는 레알마드리드 유스 출신이지만 하부 리그를 거쳐 올라와 올 시즌 프리메라리가에서 3골 4도움을 기록 중인 30세의 베테랑이다. 상대적으로 이적료가 저렴한 선수로 이강인의 공백을 메우며 최대한 금전적 이득까지 꾀하겠다는 목표다.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시점인 여름 이적 시장에서 거론되는 이강인의 예상 이적료는 1500만 유로(약 203억원)다. 발렌시아는 과거 이강인과 성인 계약을 맺으며 바이아웃으로 8000만 유로를 설정했는데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20세 이하 월드컵 MVP 활약 후에 언급됐던 이적료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코로나19로 인한 유럽 축구계의 수익성 악화로 이적 시장이 위축됐고, 이강인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많은 이적료를 받기도 어려워졌다. 발렌시아의 연이은 판단 미스는 선수와 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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