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격차’ 인재 영입에 재계 사활 걸었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1.03.30 14:00
  • 호수 16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차 산업혁명 발발로 인재의 국경 사라져
총수까지 나서 S급 인재에 ‘러브콜’

지난 2018년 말 삼성전자가 발칵 뒤집혔다. 이 회사의 전직 임원 K씨가 중국 반도체업체로 이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 임원은 삼성전자에서 D램 설계를 담당했던 인사다. 반도체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산업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런 핵심 인사가 D램 반도체 양산을 준비 중인 중국의 A업체로 이직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법원에 전직금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전자가 이직한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였다는 방증이다. 1심 법원은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K임원의 이직으로 영업비밀이 유출될 수 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K임원이 항소하면서 양측은 현재 2년 넘게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 측은 관련 소송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중국 회사로 이직한 임원이 추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적 다툼이 아직 진행 중이다.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짧게 답했다. 비슷한 사례가 더 있는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반도체업계의 핵심 인재 유출 방지는 S급 외부 인력을 수혈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이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반도체나 인공지능(AI) 분야의 석박사급 인력을 경쟁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직한 직원들을 두고 여러 차례 소송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인재 확보를 위한 반도체업계의 국경 없는 전쟁은 향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핵심 인재 둘러싼 IT업계의 ‘핑퐁게임’

지난 2년간 미국에서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였던 LG에너지솔루션(옛 LG화학 배터리 사업부)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 역시 본질은 핵심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함이라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19년 초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과 국제무역위원회(USITC)에 소송을 제기했다. “회사 인력을 빼가는 과정에서 핵심 기술을 유출당했다”는 취지였다. 이면에는 ‘더 이상 내부 인력 유출을 방치했다가는 업계 맏형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USITC는 지난 2월 LG의 손을 들어줬다. 아울러 향후 10년간 SK이노베이션 배터리의 수입을 금지한다고 판결했다. 주목되는 사실은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독일 폭스바겐의 행보다. 이 회사는 그동안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외부에서 조달해 왔다. 하지만 최근 자체 개발 및 생산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동안 폭스바겐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던 국내 업체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 일각에서는 LG와 SK의 극적 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까지 나서 양사 간 합의를 촉구할 정도다. 하지만 두 회사가 생각하는 간극이 너무 크다. LG에너지솔루션은 현재 3조원 수준의 합의금을 요구하고 있고, SK이노베이션은 1조원 수준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이처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언택트(비대면) 시대가 열리면서 주요 기업들이 핵심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계열사 CEO는 물론이고, 그룹 총수까지 나서 S급 인재 영입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정의선 회장 체제로 바뀐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그룹은 당시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OO)로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을 다시 불러왔다. 동커볼케 부사장은 아우디와 폭스바겐, 람보르기니, 벤틀리 등에서 활동해 온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다. 2015년 현대차 디자인센터장으로 합류했다. 이후 현대차 팰리세이드와 제네시스 G70, G80의 디자인 개발을 주도했다.

그는 지난해 4월 돌연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현대차그룹 측은 “일신상의 사유”라고 밝혔지만, 기아차의 준중형 SUV인 스포티지 5세대 모델 출시 과정에서 기존 경영진과 충돌한 것이 사표의 원인이라고 재계는 보고 있다. 요컨대 스포티지는 그동안 5년 주기로 출시해 왔다. 당초 일정대로라면 2020년이 출시연도다. 동커볼케 부사장이 일정 연기를 요청했고, 그룹 경영진이 반대하면서 사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순혈주의? 지금이 어느 땐데…”

이 일이 있고 8개월 정도 흘렀다. 동커볼케 부사장은 지난해 11월 다시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그것도 COO라는 새로운 직책을 통해서였다. 동커볼케 부사장의 복귀 시점은 정의선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오른 지 한 달 정도 지난 후다. 때문에 정 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실제로 정 회장은 2006년 세계 3대 디자이너로 알려진 피터 슈라이어를 CDO(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로 영입했고, 현재 기아차의 상징이 된 ‘호랑이 코’ 패밀리룩을 완성했다. 브랜드 역시 ‘K시리즈’로 일원화했다. 이후 기아차는 고질적인 경영적자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기아차에서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정 회장은 ‘형님 격’인 현대차 부회장을 거쳐 그룹 회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2018년 6월 LG그룹 총수에 오른 구광모 회장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구 회장은 취임 직후 3M 출신인 신학철 부회장과 베인&컴퍼니 출신 홍범식 (주)LG 경영전략팀 사장, 보쉬코리아 출신 은석현 VS(전장부품)사업본부 전무 등을 잇달아 영입했다. 그동안 LG그룹의 전통이었던 순혈주의를 타파했다는 점에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대기업의 공채 문화는 이제 사라지고 필요할 때마다 유능한 인재를 뽑는 수시채용이 일반화되고 있다”면서 “재계가 최근 2세와 3세를 거쳐 4세 체제로 젊어지고 있는 만큼 인사 파격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