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기증’ 3조원 이건희 소장품 어떻게 다뤄야 하나
  • 엄태근 아트컨설턴트 (taeguenum@gmail.com)
  • 승인 2021.08.10 07:00
  • 호수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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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유족들 의사와 달리 “한곳에 모아 전시”
근대와 현대로 나눠 관리하는 게 글로벌 스탠더드

최근 몇 달 동안 국내 미술계는 ‘세기의 아트컬렉션’으로 불리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미술 컬렉션으로 떠들썩하다. 지난 4월말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들은 수집품 2만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 등 국공립 미술 기관에 분배해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소장품들은 지역별 연고에 따라 각 기관들에 가장 유용하고 필요한 작품들로 선별돼 분배됐다. 기증이 예정된 2만3000여 점은 개인 컬렉션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국보급 문화재 수준의 가치를 지닌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중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와 같은 고미술품부터 한국과 서양의 다양한 근현대 작품들이 소장품에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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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0일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개최 중이다. 20세 초중반 한국 미술의 대표작으로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이응 노, 유영국, 권진규, 천경자 등 한국인이 사랑하는 거장 34명의 주요 작품이 망라됐다.ⓒ시사저널 이종현

‘세기의 경매’라던 록펠러 3세 컬렉션 경매 낙찰액도 1조원 안 돼

기증된 2만3000여 점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면 약 3조원의 감정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 회사에서 열렸던 ‘세기의 경매’로 불렸던 미국의 석유 재벌 가문인 록펠러 3세 컬렉션의 경매 낙찰금액(약 9210억원)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7월초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소장품 활용 방안은 유족들의 의사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부는 기증된 소장품들을 ‘이건희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미술관 건립을 통해 통합적으로 소장·관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삼성가 유족들이 삼성문화재단 산하에 자체적으로 미술관을 건립하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각 지방자치단체의 미술관에 나누어 기증했다는 데는 분명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증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증 기관으로부터 다시 회수해 별도의 미술관을 건립하려는 시도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미술품 같은 경우에는 인류가 걸어온 시간을 상징하는 역사의 문화적 유산이다. 세부적인 역사적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타이틀 아래 흩어진 소장품을 산발적으로 한데 묶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인지 의문이다. 미술관, 박물관의 주요한 기능은 연구, 조사, 교육, 기록, 보존, 관리 등이다. 후세를 위해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대대로 넘겨주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전시 및 미술품 감정은 주요 기능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유족들의 의사대로 이미 건립돼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국공립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다면 굳이 추가적인 예산을 들일 필요 없이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다.

기증된 고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들을 시기에 따라 근대미술과 현대미술로 구분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선진 해외의 경우에는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구분이 명확하다. 근대미술과 현대미술 사이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전후 미술이라는 용어까지 세부적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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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여인》ⓒ문화체육관광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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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문화체육관광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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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문화체육관광부 제공

프랑스, 근대의 오르세 미술관과 현대의 퐁피두센터로 구분

기증관을 별도로 세우기보다는 이미 기증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품을 제대로 관리하고 조사·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더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대’를 분리해 국립근대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예술법 전문가인 캐슬린 김(한국계) 미국 뉴욕주 변호사는 “최근 한국의 동시대 예술이 크게 성장하고 예술시장도 아시안 허브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아트마켓에서 ‘근대미술’이 소외받고 있다”며 “문화적, 예술적, 역사적 맥락 없이 한곳에 모아 ‘통합 전시관’을 만들기보다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과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대미술품들을 모아 ‘국립근대미술관’을 설립해 ‘근대’를 복원하는 방안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MMCA·Modern and Contemprary Art’로 근대와 동시대 예술을 포괄한다.

미국 뉴욕에 위치한 모마(Museum of Modern Art)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의 인상파, 입체파와 같은 다양한 근대미술품 등을 주로 다루며, 생존해 있는 현대미술 작가들은 뉴 뮤지엄(New Museum)과 같은 기관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또한, 삼성가와 같이 전통 있는 휘트니 가문과 같은 독립적인 재단의 역할을 하는 휘트니 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도 존재한다. 말 그대로 휘트니 뮤지엄은 미국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수집·기록·보존·관리 등에 집중하고, 휘트니 비엔날레까지 개최하며 자국의 현대미술 발전에까지 기여하고 있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파리에는 모네, 드가, 마네, 반 고흐 등 주요 인상파 화가들의 걸작들이 전시돼 있는 근대미술관인 오르세 미술관과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다루는 퐁피두센터가 동시에 존재한다. 영국 런던에도 테이트 모던에서는 현대미술을,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근대미술을 전담으로 맡고 있다. 이처럼 해외 유명 미술관·박물관들은 같은 미술품이라도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따라 구분하고 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각 미술 기관들이 더 풍요로운 예술적 생태계를 창출하고 있다.

 

한류 열풍, 미술 산업에서도 가능

더 나아가 문화와 예술도 국력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근 몇 년간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글로벌하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을 목격했다. 한국은 문화 선진국 반열에 올라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BTS를 알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궁금해한다.

내년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프리즈(Frieze)가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키아프(KIAF)와 공동으로 개최된다. 한류의 열풍은 우리나라 미술 산업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세기의 컬렉션’이 미술 한류의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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