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위상 흔들리는 한국 여자골프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8 16:00
  • 호수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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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처음으로 LPGA 메이저 ‘무관(無冠)’
외신 “도쿄올림픽 4명 출전하고도 노 메달”

부동의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한국 여자골프의 철옹성(鐵甕城)이 무너지고 있다. 도쿄올림픽 여자골프 ‘노(No) 메달’에 이어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에서 무관(無冠)에 그치면서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현실화되고 있다.

도쿄올림픽 이후 “4명의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고도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한 것은 한국 여자골프의 지배력이 하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한 외신의 보도만 봐도 한국 선수의 견고함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올 시즌 한국 선수의 LPGA투어 대회 우승은 22개 대회를 치른 8월23일 현재 3월 KIA 클래식 박인비(33), 5월 HSBC 월드챔피언십 김효주(26), 7월 볼런티어오브아메리카 클래식 고진영 등 3승이 전부다. 박인비·고진영 등 한국 선수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세계랭킹 1위 자리도 내줬다.

8월4일 도쿄올림픽에서 박인비가 2언더파로 1라운드를 마친 뒤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이 여자골프 판도 확 바꿔

한국이 주춤하는 사이에 현재 세계랭킹 1위 넬리 코다(미국)가 3승을 올린 미국이 7승, 메이저대회 ANA 인스피레이션에서 우승하며 ‘안니카 메이저 어워드’(5개 메이저 대회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를 수상한 패티 타바타나킷의 태국이 4승을 올리고 있다. 2014년 창설된 안니카 메이저 어워드는 2014년 한국계 미셸 위(미국)를 시작으로 2015년 박인비, 2016년 한국계 리디아 고(뉴질랜드), 2017년 유소연(31), 2018년 아리야 주타누간(태국), 2019년 고진영(26) 등이 수상했다. 그러나 올해는 이정은6(25)가 24점을 받아 11위에 올랐을 뿐 한국 선수는 톱10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동안 국적으로 치면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수가 LPGA투어를 누비며 본토 미국 선수들을 앞서는 성과를 보였다. 20여 명이 활약하며 시즌마다 우승자의 30% 내외는 한국 선수로 채워졌다. 30여 개 대회에서 10승 안팎은 한국 선수들의 차지였다. 하지만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분위기를 확 바꿔놓고 있다.

현재 한국 여자골프의 현주소는 8월23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끝난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AIG 여자오픈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안나 노르드크비스트(스웨덴)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선수는 11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우승자가 없는 시즌을 맞은 것이다. 한국은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메이저대회에서 매년 1승 이상씩 올렸다. 이번 AIG 여자오픈에 세계랭킹 2위 고진영과 6위 김효주(26)가 불참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메이저대회에서 ‘톱10’에조차 단 한 명도 들지 못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높은 순위인 김세영(28)이 공동 13위에 그쳤다.

한국 선수가 LPGA투어에서 처음 우승한 것은 구옥희가 1988년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 대회에서였다. 이후 한국은 박세리가 1998년 US오픈과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등 4승을 올리며 LPGA투어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2002년 박세리·김미현·박지은이 ‘트로이카’를 형성하면서 9승을 올린 데 이어, 2006년에 11승을 달성하며 ‘10승’벽을 처음으로 뚫었다. 이른바 ‘세리키즈’ ‘인비키즈’의 등장 이후 여자골프 최고 권위의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는 10년간 무려 7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매년 LPGA투어의 절반 가까이를 우승하며 압도적인 지배력을 과시했던 한국을 놓고 외신은 US여자오픈은 사실상 ‘US코리아여자오픈’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지난해 코로나19 사태에 제대로 대회가 열리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은 메이저대회 2승을 포함해 7승이나 올렸다. LPGA투어가 정상적으로 진행된 2019년 역대 최다승 타이 기록인 15승과 메이저 3승을 달성한 데 이어 엄청난 성과였다.

ⓒ연합뉴스
8월5일 18번홀에서 고진영이 퍼팅 실패 후 아쉬워하고 있다.ⓒ연합뉴스

태국·필리핀 등 동남아와 일본 신예들 무섭게 치고 올라와

무엇이 한국의 견고함을 무너트리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19로 인해 선수들이 안정적인 스케줄 관리를 못 하면서 출전 자체가 불안한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LPGA투어는 미국과 아시아, 그리고 유럽을 오가며 대회를 개최한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 방역이 강화된 국가에서 열리면 상위 랭커들이 출전을 꺼린다. 지난해 김효주는 LPGA투어에 단 한 차례도 나가지 않고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만 출전했다.

비단 대회 출전뿐만이 아니다. 한 해 농사를 결정지을 겨울 전지훈련도 차질을 빚으면서 선수들의 경기력도 떨어졌다. 여기에 매년 대여섯 명이 신규로 미국 진출을 노리지만 지난해에는 US여자오픈에 처음 출전해 우승한 김아림(26)만이 새로 빅리그에 입성했다. KLPGA투어가 활성화되면서 최고의 샷 감각을 보이고 있는 박민지(23)를 비롯해 최혜진(22)·박현경(21)·임희정(21)·유해란(20) 등 ‘영건’들이 코로나19로 불안한 미국보다는 한국에 머무르면서 LPGA투어 진출에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뛰어난 기량을 지닌 태국·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와 일본, 미국, 유럽 등 신예 선수들의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한국의 지배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대세’였던 박성현(28)이 부진의 늪에 빠져 있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다. 박성현은 당초 박세리-박인비를 잇는 한국 여자골프의 주축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메이저대회 2승을 포함해 7승을 거두며 순항했으나, 올해 열린 5개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컷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는 등 갑작스레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다. 올해 15개 대회에 출전해 겨우 5개 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했으며, 공동 32위가 최고 성적이다.

여기에 메이저 2승 등 3승의 전인지(27)도 올 시즌엔 준우승이 한 번 있을 뿐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역시 매년 승수를 올리던 김세영(28)과 유소연(31)도 우승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아직 LPGA투어는 11월22일 끝나는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까지 8개가 남아 있다. 한국 여자골프가 올해 이대로 그냥 주저앉고 말 것인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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