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외무장관 최악의 스캔들에도 끄떡없는 크렘린궁
  • 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9.28 12:00
  • 호수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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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외교의 얼굴’ 라브로프 외무장관의 내연녀 문제로 시끌
국정농단 스캔들 폭로 불구, 총선에선 집권당 압승

지난 17년간 러시아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러시아 외교의 얼굴’이라 불리는 세르게이 라브로프(71). 푸틴 정권의 각료 중 가장 평판이 좋고 인기가 높았던 그가 부정부패 및 내연녀의 국정농단 스캔들로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다. ‘라브로프와 친밀한 여성’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9월14일 이 소식을 처음 폭로한 탐사보도 언론 ‘바즈나야 이스토리야’(istories: Important Stories)의 유튜브 방송은 현재 조회 수 60만을 기록 중이며, 이어 ‘요트·뇌물과 내연녀, 라브로프 장관이 숨기고 있는 것’이라는 제목의 나발니 반부패재단(FBK)의 추가 폭로 역시 500만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타임스·메두사·인사이더·더벨·스보다 등 러시아 독립언론들이 이 사안을 모두 앞다퉈 보도하며 러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EPA 연합
2018년 7월1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대사 및 국제기 구 상임대표와의 회담을 위해 나란히 입장하고 있다.ⓒEPA 연합

내연녀와 딸 등 국내외에 상당한 재산 축적

이 두 폭로 다큐의 주장을 종합하면, 라브로프 장관의 내연녀로 주목을 끈 인물은 단역 여배우 출신(2016년 전쟁 드라마 《히어로》 출연)이자 고급 식당 경영자인 스베틀라나 폴야코바다. 라브로프 장관과 오랜 시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폴야코바는 외무부의 실세로 러시아와 영국에 상당한 재산을 부정 축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즉 그녀의 시누이를 비롯해 친지와 지인들은 외무부 요직을 얻기도 하고, 이에 반대의사를 나타냈던 외무부 직원들 다수가 사임 압박을 받아왔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의 5년간 수입이 9700만 루블(약 16억원)에 불과한데도, 러시아 및 세계 최고 부동산 가격을 기록 중인 모스크바 골든마일 지역에 260㎡로 추정되는 최고급 아파트를 포함해 총 10억 루블(약 116억원)이 넘는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폴야코바는 ‘외교 임무’ 또는 ‘외교 협상’이라고 주장하며 지난 7년간 60회가 넘게 외무부 관공기를 타고 라브로프 장관의 주요 해외출장에 동행했는데, 심지어 풀야코바의 모친·딸·조카 등도 동행한 경우가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폴야코바가 실제로 외교부 소속 직원인지 여부는 매체마다 의견 차가 있지만, 러시아의 공식 고위 외교관 직책을 보유하고 있진 않다.

라브로프 외무부 장관은 악명 높은 러시아 재벌 올렉 데리파스카의 로비스트 역할을 해 오는 가운데, 이 억만장자의 미국 비자 신청을 지원하고 개인적 사업 문제의 뒤를 봐주는 대가로 자신과 폴야코바 가족이 제트기와 요트 그리고 초호화 빌라 등을 대여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의혹을 폭로하고 있는 탐사보도는 주로 라브로프의 딸 폴리나의 인스타그램과 여러 증언들 그리고 비행기록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영국에 유학 중인 폴리나는 다수 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2016년 21세의 나이에 600만 달러(약 70억원)에 상당하는 고급 아파트를 999년간 임대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보도에서 문제가 된 요트는 전 부총리 세르게이 프리호드코가 콜걸들과 섹스파티를 벌인 가운데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을 누설했다고 알려진 문제의 그 요트와 동일하다. 이 스캔들은 당시 요트에 초대된 벨라루스 에스코트(고급 콜걸)인 나스티야 립카가 전화로 녹음한 것을 소셜미디어 및 책으로 출간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이미 기혼이었던 라브로프 장관은 그동안 “전통적 가족의 가치”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보수층의 인기를 얻어왔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야 자하로바는 언론 브리핑에서 장관 스캔들을 폭로하는 이들을 독일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에 비유하며, 러시아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고 러시아를 적으로 여기는 나라의 지원과 조종이 그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또한 인간이다”며 라브로프를 변호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1971년 스리랑카 주재 대사관에 배치된 후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유엔 러시아 대사를 역임해온 베테랑 외교관이다. 지난 주말 3일간에 걸쳐 열렸던 총선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추천으로 집권당을 대표하는 5인 리스트에도 오를 만큼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

 

“정부 관료 부패에 관성 생겨 폭로에도 둔감”

이번 스캔들이 정국에 미칠 영향은 명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미하일 화가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비록 푸틴은 반대해도 라브로프 장관에 대한 신뢰는 갖고 있던 많은 시민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들이 그를 사기꾼으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러시아어 신문 서울헤럴드의 전 편집장 에브게니 스테판은 필자에게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즉 러시아 국민은 정부 관료들의 부패에 관성이 생겨 이런 소식에 둔감해졌고, 대다수가 정보를 얻는 통로인 TV매체는 국영이기 때문에 이 같은 뉴스가 널리 알려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전망했다. 또한 러시아에는 독립된 사법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처벌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스캔들이 이번 러시아 총선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방의회 하원 450명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집권당은 49.82%의 득표로 독자적 개헌선을 보장받는 3분의 2 의석을 차지했다.

2월 이후 수감 중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5)는 9월21일 옥중서신(인스타그램)에서 합당한 이유 없이 오래 지연된 전자투표 결과를 부정선거로 지목하며 “우리의 싸움은 단기전이 아니라, 길고 힘든 마라톤”이라며 러시아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싸우자”고 지지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나발니의 반부패재단은 2011년 창립한 이래, 의료비가 없어 고통받는 중병의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기부를 요청하는 광고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탈세를 일삼아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정부 고위 관료들의 부도덕성을 거듭 비판해 오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정적 탄압이 더 극심해졌다. 독립 선거감시단체인 ‘골로스’에 의하면, ‘외국 스파이법’이라는 명목으로 최소 900만 명 이상 성인의 공직 출마가 금지되어 있다. 올 6월 나발니의 반부패재단이 ‘극단주의단체’로 규정되고 불법화되자 주요 멤버들은 모두 국외 망명 중인 상황이다. 관련 웹사이트는 차단되었고, 협력관계에 있는 개인은 후보등록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발니 지지 세력인 이른바 ‘나발니팀’은 그간 개별 선거구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야권 후보를 알려주는 ‘스마트 보팅’ 앱을 주요 선거전략으로 적극 홍보해 왔다. 러시아 통신감독 당국은 이 앱을 인터넷에서 차단했다. 미국의 구글과 애플사는 직원들의 형사 기소라는 협박카드까지 제시한 러시아 정부의 압박에 굴복해 러시아 온라인스토어에서 ‘스마트 보팅’ 앱을 없애고, 추천후보 정보가 포함된 구글 문서 접근을 막아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어 봇을 제거한 텔레그램에도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선거 관련 수많은 부정행위로 인해 골로스가 “러시아 역사상 가장 더러웠던 선거 중 하나”로 평가한 이 선거에서 고군분투하는 야권의 싸움을 더 힘겹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치연구소인 ‘R Politik’은 이번 스마트 보팅 앱 차단 사태에 대해 “권력이 선(善)에 앞선다는 사례를 보여주었다”며 현재 나발니팀이 해체되고 있고, 이로 인해 야권 운동이 분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향후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고된 여정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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