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매천 댁 오동나무
  • 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31 17:00
  • 호수 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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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이 오고, 세상 형편도 좀 좋아지면 맨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의 고택이 있는 전남 구례다. 그곳에 가서 매천 선생의 시가 된 뜨락의 오동나무를 정중하게 ‘알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조국의 주권이 강탈되는 사태에 외침으로 맞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시인이자, 조선 후기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인 황현 선생은 46세이던 1900년 어느 날, 정원에 자라고 있는 꽃과 나무 열다섯 가지를 주제로 꽤 긴 시를 지었다. 이사 온 후 12년 동안 벗이 돼줬던 오동나무와 개오동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대나무, 파초, 국화, 모란, 매화, 소나무, 뽕나무, 홰나무, 백일홍이 시의 주인공들이다. 

매천 황현 선생 초상화ⓒ연합뉴스

매천은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34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암담한 국운과 시대 상황에 환멸을 느낀 그는 출세의 길을 버리고, ‘혼란스러운 도깨비 세상 같은 곳’을 떠나 스스로 은거했다. 구례 시루봉 기슭에 마련한 소박한 집, 조촐한 뜨락엔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오동나무와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손수 심고 가꾼 사계절 꽃들이 피고 졌다. 공부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이 정원에서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걸고, 생각을 나누며 내밀한 교감을 이어가던 매천은 마침내 아름다운 정원 스케치를 겸한 ‘마음 고백’을 열다섯 편의 시로 완성했다.

그중 매천이 첫 번째로 꼽은 나무는 《오동》이다. 시에 따르면 이 오동나무는 매천이 이사 오기 전부터 서쪽 뜨락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는 해마다 쑥쑥 자라 더운 여름에는 햇볕을 가려주고, 짙은 그늘을 드리워줄 정도가 됐다. 어느 날 이웃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면 좋겠다”고 말하자, 매천은 단호하게 그럴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옛날 선비 중에는 줄 없는 거문고, 무현금(無絃琴)을 실제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보다 훨씬 멋있게 여겼다는데, 나는 굳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 것 없이 오동나무 그 자체를 거문고로 여기겠노라’는 생각이었다.  

매천에게 오동나무는 곧 거문고였다. 그는 이전에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무금금(無琴琴)’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무현금 세계를 넘는 경지를 꿈꿨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동나무가 들려주는 감상자가 아닌, 스스로 연주하는 이가 됐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들어주는 이는 있을까?’ 그러다 이내 손사래를 친다. ‘아니지. 굳이 들어주는 이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알면 그만이지.’ 이런 마음을 담은 《오동》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손을 저어 종자기(鍾子期)를 사양하노라. 나의 음악을 아는 이는 나 자신이니까. 손을 내저으며’라는 말의 여운이 퍽 강렬하게 와닿는다.

어려운 시대,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났으나, 그 세상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지식인의 초상이 오버랩된다. 그의 고독하고 힘겨웠을 시간들, ‘손을 내저으며’ 나만의 오동나무를 마주했던 이 시골 선비는 이로부터 십 년 후, 나라를 걱정하며 결연하게 목숨을 내놨다. 그가 생애 동안 품었던 뜻과 생각과 글은 수많은 ‘지음’에 의해 갈무리돼 세상에 널리 퍼졌고, 시대에 큰 울림이 돼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그가 ‘손을 저으며 사양했던 마음’의 진가는 시간을 두고 빛을 발했던 것이리라. 여럿이 무리 지어 다니며, 큰 목소리로 일을 도모하는 이가 유독 많은 시절. 그 누구라도 이렇게 ‘스스로 떳떳한 시간’을 보낸 이가 있다면 참 다행이겠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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