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다정함이 힘이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03 08:00
  • 호수 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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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의 지인들과 만나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행운을 누린 세대다.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해온 과학기술의 변천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봐 왔을뿐더러 그 혜택 또한 풍족하게 누렸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가 겪었던 전쟁의 참화에 휩쓸린 적도 없다. 그렇게 인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긴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 말은 이제 틀렸다. 인생의 후반기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전쟁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 적을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다. 공포는 끝이 없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매번 한없이 불길하다. 코로나19가 지배하는 연말연시의 풍경은 잔뜩 찌푸린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하다. 숱한 인명을 앗아간 바이러스 전쟁은 살상무기를 들고 싸우던 이전의 전쟁 이상으로 끔찍하다. 이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해마다 연말이면 주목받는 네 글자의 말이 있다. 교수신문이 지난 2001년부터 매년 발표해온 ‘올해의 사자성어’가 그것이다. 2021년에는 ‘묘서동처(猫鼠同處)’가 한 해의 상징 문구로 뽑혔다. 말 그대로 고양이와 쥐, 즉 ‘도둑 잡는 자와 도둑이 한패가 됐다’는 뜻을 지닌 사자성어다. 대선을 앞두고 빚어지는 혼탁한 정치 상황이 이 네 글자 속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묘서동처’ 말고 후보에 오른 다른 사자성어들도 눈길을 끈다. ‘날마다 도망치다 보니 사람이나 말이나 다 기진맥진하다’는 뜻을 가진 ‘인곤마핍(人困馬乏)’(2위)과, 백 자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의미로 몹시 위태로운 지경을 뜻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5위)는 엄혹한 코로나19 시대의 고난을 단 네 글자만으로 빈틈없이 수렴한다. 이 전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모습을 자주 바꾸며 출현하는 적의 변신술도 어지럽고 종전(終戰)에 대한 예측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끌려갈 수만은 없다. 더 이상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함께 맞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해내다 보면 언젠가 이 전쟁도 끝을 보일 것이다. 함께하면 할수록 희망의 무게 또한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YTN 캡처
ⓒYTN 캡처

이번 연말 대구의 한 공동주택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그 희망의 빛 한 자락을 보여주었다. 택배기사에게 간식 바구니를 내놓은 주민과, 그 온정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CCTV 앞에서 꾸벅 인사한 택배기사의 모습은 우리가 이 힘든 국면에서 서로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은 채 나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잊지 못할 삽화다.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라는 두 명의 진화인류학자가 지난 2020년에 내놓은 책의 이름은 ‘Survival of the Friendliest(한국어 제목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다. 자신이 직접 참여한 실험 등에서 얻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화론의 새로운 단면을 제시한 서적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협력적 의사소통에 능하고 친화력이 강한 개체가 더 강한 생존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생명을 지키는 다정함의 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다.

진화론을 떠나서도 다정함은 인간에게 늘 소중하고 긴요한 덕목이다. 그리고 인류를 위기에 빠트리는 어떤 전쟁에서도 인류를 가장 강하게 지켜줄 무기가 바로 이 ‘다정함’이다.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땀 흘리는 의료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역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표현하는 택배기사, 함께 손잡은 그 모든 분의 새해에 온기 넘치는 다정함이 소복이 쌓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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