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을 경남 함안서 만나다
  • 이상욱 영남본부 기자 (sisa524@sisajournal.com)
  • 승인 2022.02.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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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지난해 11월 대암 이태준 기념관 개관

일제강점기 몽골인들이 신의(神醫)라 칭송했던 대암 이태준(1883~1921년) 선생. 그는 몽골에서 인술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한 데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다. 경남 함안군은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의 역사 등 가치를 알리기로 했다. 

함안군은 지난해 11월 군북면에 대암 이태준 기념관을 개관했다.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과 희생정신으로 점철된 일생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이태준 선생의 연도별 발자취를 기록한 벽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함안 군북면 명관리 출생인 선생의 성장 과정과 24살이 되는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해 독립운동을 펼친 일대기가 사진과 함께 큰 글씨로 기록돼 있다. 

터치스크린을 누르니 함안에서 서울, 중국 난징, 몽골의 고륜(현 울란바토르) 등에 이르는 선생의 발자취가 구현된다. 이곳은 사진과 텍스트뿐만 아니라 독립신문, 당시 교재로 사용했던 의학서적, 영상 등도 전시돼 있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러시아의 백위파 부대에 안타까운 죽임을 당할 때까지 선생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난해 11월 함안군 군북면에 개관된 대암 이태준 기념관 내부 ©함안군
지난해 11월 함안군 군북면에 개관된 대암 이태준 기념관 내부 ©함안군

이태준, 의사로 번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 

기념관 한쪽에는 이태준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의 원문과 해석본을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선생님이 옥에서 나오시어 병원에 계실 때에 청년 학우회에 입회하라고 열심히 권면하시며 회비 일 원을 주시면서…” (이태준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中, 1919년 7월16일) 

선생은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 청년단체인 ‘청년 학우회’에 가입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특히 선생은 몽골로 이동한 후 동의의국을 설립했고, 의사로 번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했다. 선생은 당시 몽골에서 유행한 전염병을 퇴치한 공로로 몽골 정부의 국가 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를 받았다. 가히 몽골인들이 선생을 신의(神醫)라고 칭송한 게 허언이 아니다. 단순한 의술을 펼친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료했을 청년 이태준의 진심이 전해진다.

이곳 기념관은 옛 군북역사 터로 함안독립공원과 함께 있다. 군북면에 거주하는 한 어르신은 매일 운동 삼아 공원을 몇 바퀴 돈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에게 훌륭한 휴식공간이다. 함안군은 이곳에 증기기관차를 설치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함안군은 올해 기념관 옆 철도공단 시설 건물을 리모델링해 함안 독립운동사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이 일대가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구심점이 될 전망이다.

기념관 건물 뒤편에 있는 이태준 선생 흉상 ©함안군
기념관 건물 뒤편에 있는 이태준 선생 흉상 ©함안군

전염병 퇴치 공로로 몽골 국가 훈장 받아

함안군은 2011년부터 몽골 울란바토르시 항올구와 농업 연수 등을 활발하게 교류해왔다. 지난해 11월 몽골에서 항올구 구청장 등이 기념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롯이 선생 덕이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선생을 두고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하며, 외국에서 국제친선을 도모했던 국제화의 선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선생은 100여 년 전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국제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태준 선생에게는 ‘몽골의 슈바이처’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인류애를 실천한 업적을 높게 평가한 대목이다. 하지만 기념관을 둘러보면 선생을 하나의 수식어로 한정 짓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와 인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청년의 희생과 헌신이 고귀하기 때문이다. 기념관 건물 뒤편에 이태준 선생의 흉상이 있다. 흉상 옆에 나란히 서면 멀리 선생의 생가 뒷산인 백이산(369m)자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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