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상징투쟁 혹은 ‘한동훈의 악마화’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kjm@jbnu.ac.kr)
  • 승인 2022.06.03 17:00
  • 호수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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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집단적 삶은 상징투쟁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늘 상징에 많은 것을 건다. 그래서 정치는 ‘상징조작의 예술’이 된다. 상징이 없는 사회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 상징은 정교하지 않다. 아니 정교해선 안 된다. 다양한 구성원을 가진 집단의 감정적 힘을 결집하기 위해선 단순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는 상징도 있지만, 지속성이 약해 잠시 반짝하고 사라지는 상징도 있다. 세월이 꽤 흐른 후에 과거의 상징들을 돌아보면 우스꽝스러운 게 많다. 그게 그렇게까지 집단적 열정을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상징이었는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년 전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었던 사건을 상기해 보라. 한 여성 가수는 이 책을 읽었다고 밝혔다가 반(反)페미 진영의 공격을 받는 수난을 당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몇 차례 더 일어나면서 《82년생 김지영》의 ‘페미니즘 상징’으로서의 지위는 공고해졌고, 이 책을 단 한 줄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이 책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건 난센스였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냥 좋은 책이었을 뿐 그렇게까지 펄펄 뛸 일은 아니었다. 동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만 하나?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말할 자유도 없단 말인가? 긍정이건 부정이건 각자 자신의 감상평을 자유롭게 말하면 될 일이지, 그 책이나 영화를 본 것 자체에 비난을 퍼부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게 바로 상징투쟁의 함정이다. 이 책이나 영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언급을 하면 반(反)페미 책동으로 몰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안별로 분리해 평가해야 할 일마저 자신의 진영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져 판단하는 정치권의 진영전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상징투쟁과 진영전쟁은 모든 문제를 흑백 이분법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무엇이건 상징이 되면 타협이 없는 ‘올인 게임’이 되고 만다. 상징은 늘 편가르기에 따라 ‘성역화’되거나 ‘악마화’되기에 이런 상징투쟁에 타협은 없다.

작가 김민희는 최근 출간한 《다정한 개인주의자》에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근거로 ‘갈등의 진짜 원인’은 페미니즘과 무관한 ‘세대 차이에 의한 가치관의 충돌’이라고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도 적잖이 작용했을 게다. 페미니즘이 의존하는 ‘정체성 정치’는 “구조의 책임을 나에게 묻지 말라”고 외쳐대는 젊은 남성들의 개인주의적 감수성과 충돌한다. 이걸 꼭 페미니즘을 둘러싼 갈등으로 환원해야만 할까? 기존의 상징투쟁은 그런 의문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하지만 상징은 “이해와 행동으로 가는 효과적인 지름길”(에드워드 버네이스)이 아닌가. 사실 바로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정치인들이 지름길의 유혹에 너무 쉽게 굴복하면서 상징투쟁이 오·남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판에서 가장 뜨거운 상징이 된 한동훈 법무장관의 경우도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원인 제공자인 대통령 윤석열도 비판받을 점이 있지만, ‘윤석열 악마화’의 처절한 실패 경험에도 ‘한동훈 악마화’를 다시 밀어붙이는 민주당의 집요한 일관성이 놀랍다. “증오가 없는 사람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체 게바라의 금언을 너무 신봉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리 정치가 전쟁일지라도 승패는 전사의 열정이 없는 유권자들에 의해 결정될 텐데 말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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