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빈자리 채울 후계자가 안 보인다
  • 사혜원 영국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6.11 10:00
  • 호수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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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 행사 때 울려 퍼지는 ‘왕실 폐지’ 여론…“엘리자베스를 마지막으로 군주제 폐지”

96세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전 세계 사람 대다수가 알고 있는 유일한 영국의 군주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윈스턴 처칠부터 14명의 총리와 함께 일했으며, 그 어떤 영국 통치자보다 더 오랜 기간 ‘대영제국’을 이끌었다.  

영국은 6월2일부터 5일까지 총 나흘 동안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화려한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를 열었다. 기념 콘서트에서는 퀸과 에드 시런 등 영국의 대표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있었고, 일요일에는 영국 각지에서 1만6000개 이상의 거리 파티가 열렸다. 

런던 외곽에 거주하는 데이비드 올우드(66)는 “여왕은 지난 70년 동안 영국 왕실이 보여줘야 하는 행동과 의무의 표준을 정했고, 그의 모범이 되었다”고 말했다. 올우드는 “1952년, 여왕 즉위 연설문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녀는 정말로 ‘국가와 국민에게 자신이 맹세’한 것을 지켰다”며 “적어도 내 생각에는, ‘우리 여왕님(our queen)’은 확실히 이 나라가 가진 최고의 보물”이라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향한 무한 사랑을 표현했다. 

이처럼 올우드를 포함한 많은 영국인은 여왕을 깊게 신뢰하고, 높이 평가한다. 왕실 분석가이자 《The Queen’s True Worth(여왕의 진정한 가치)》의 저자인 데이비드 맥클루어는 “정부의 수장이 바뀌는 것과 다르게,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1000년 동안 존속하고 있고, 남다른 연속성과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주 중 한 명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AP 연합
엘리자베스 2세 국 여왕(왼쪽 셋째)이 즉위 70주년 기념행사인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 첫날인 6월2일(현지시간) 찰스 왕세자(왼쪽 둘째) 부부, 윌리엄 왕세손(오른쪽) 가족과 함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공중분열식을 지켜보고 있다.ⓒAP 연합

계승 1순위 찰스, 왕위 계승 찬성 34% 불과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을 제외한 영국 왕실에 대한 영국인들의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최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스캔들과 드라마가 왕실을 휩쓸었다. 왕위 계승 서열 6위인 여왕의 손자 해리 왕자는 메건 마클 공작부인과 함께 왕실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마클은 나중에 영국 왕실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폭탄 인터뷰를 했다. 게다가 지난 2월,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는 17세 소녀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해 가을부터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난해 10월에 여왕은 지팡이를 짚고 걷기 시작했으며, 공식적인 자리에 훨씬 덜 얼굴을 비쳤고, 의회 개회식에서 영국 정부의 입법 의제를 설명하는 연설문 낭독과 같은 주요 행사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번 플래티넘 주빌리에서도 여왕은 세인트폴 성당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위 계승 문제 역시 왕실의 큰 골칫거리 중 하나다. 계승 서열 1순위인 찰스 왕세자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많은 영국인은 찰스가 다이애나비와 결혼한 상태에서 지금의 아내인 카밀라 파커-볼스와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해 여전히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 런던 시민 롤라 크라서는 “찰스는 다이애나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가 결혼하고 너무 빨리, 너무 공개적으로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다”며 다른 많은 영국인도 그녀와 비슷한 이유로 찰스 왕세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영국 국민 중 34%만이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되기를 바란다. 이보다 약간 더 많은 37%는 찰스의 장남 윌리엄 왕세손(계승 서열 2순위)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가 퇴위할 계획은 없어 보인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와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의 전 편집자인 맥스 헤이스팅은 이와 같은 이유로 왕실의 다음 세대로의 전환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여왕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군주제에 대해서는 훨씬 덜 헌신적이다”며 “여왕이 사라지면 영국의 군주제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연약한 제도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을까”라는 견해를 밝혔다. 여왕의 별세가 ‘왕실 폐지’ 여론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군주제, 100년 후에도 살아남을 것”은 52%

이와 같은 전망은 여론조사에서도 볼 수 있다. 5월에 실시된 유고브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약 80%가 여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60%가 군주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령대별로 보면, 65세 이상은 77%가 군주제에 찬성하는 반면, 18~24세 젊은 층에서는 군주제 지지율이 거의 33%까지 떨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2011년과 비교해 보면 군주제 지지도는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2012년 12월에는 73%가 군주제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응답한 반면, 올해 5월에는 56%가 이 같은 답변을 했다. 

이처럼 입헌군주제의 상징적 국가인 영국에서도 왕실 폐지 여론이 확산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별세로 왕실 폐지 논의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특히 반(反)군주제 단체인 ‘리퍼블릭(Republic)’의 행보가 눈에 띄는데, 그들은 ‘엘리자베스를 마지막으로. #군주제 폐지.(Make Elizabeth the Last #abolishthemonarchy)’라는 슬로건으로 영국 전역에 광고판을 세웠다. 영국 레딩시에 거주하는 엠마 맥도날드(21)는 이에 대해 “나는 여왕을 개인적으로는 신경 쓰지 않지만, 군주제라는 개념이나 영국 왕실이라는 기관에 대해서는 정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맥도날드는 군주제에 대한 세대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며 “나의 조부모님들은 왕실을 정말 좋아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젠 ‘군주제를 폐지할’ 때가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런던 로열 할로웨이대학교의 마케팅 및 소비자 연구 교수인 폴린 매클라런은 “많은 사람이 여왕이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공개적으로 궁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영국 왕실은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외에도 커먼웰스(영연방) 국가들(캐나다·호주를 포함한 카리브해와 남태평양 지역의 12개 국가)을 통치하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라진다면 우선적으로 이 나라들에서 군주제 폐지 목소리가 강해질 것이라는 의견이다. 찰스 왕세자나 윌리엄 왕세손은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세계적인 위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에 바베이도스는 여왕을 국가원수로 두지 않기로 결정했고, 자메이카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기에, 이와 같은 주장은 힘을 얻고 있다. 

왕실 역사가이자 《군주: 엘리자베스 2세의 삶과 통치》의 저자인 로버트 레이시는 “여왕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잘 작동하는 군주국을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세계에서 군주국으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취”라는 것이다. 영국 전체의 과반을 조금 넘는 52%만이 ‘100년 후에도 군주제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대답하는 지금, 영국 왕실의 향방은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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