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겠다” vs “결단력 부족” 이재용에 쏠린 눈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6.15 10:00
  • 호수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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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신화, 글로벌 반도체 혈전 속 강력한 도전에 직면
“5년 뒤도 불투명…오너의 빠른 결정에 경쟁력 판가름”

“숫자(투자액)는 모르겠고 그냥 목숨 걸고 하는 겁니다.”(5월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경제위기를 비롯한 태풍의 권역에 우리 마당이 들어가 있어 정치적 승리(지방선거 압승)를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닙니다.”(6월3일,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윤석열 대통령이 일주일여의 간격을 두고 한국 경제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것저것 재고 따질 새가 없을 정도로 위기 대응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거친 표현 사이에는 반도체란 교집합이 존재한다. 

이 부회장은 ‘목숨 걸고’ 발언 이후 재판에 불출석 이유서를 제출하고 6월7일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등 반도체 사업 강화에 고삐를 죄고 있다. 이 부회장이 출장을 떠난 날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반도체 관련 특강과 토론으로 대체했다. 정책 결정자들이 국가 안보·전략적 측면에서 반도체 산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게 대주제였다. 

이 부회장과 윤 대통령의 행보는 컨벤션 효과를 내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변화가 물밀 듯이 밀려올 듯한 기대감도 싹튼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가. 최일선 현장에서는 반도체 산업의 위기가 단순히 투자나 정책 지원 확대만으로 뚝딱 개선될 문제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를 이끄는 이 부회장이 기업가적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현상 유지도 어렵다는 비관론이 많다.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7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 항공센터(SGBAC)를 통해 출국하고 있다.ⓒ연합뉴스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7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 항공센터(SGBAC)를 통해 출국하고 있다.ⓒ연합뉴스

“이 부회장이 결정 안 해 답답한 경우 적지 않아”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한 결과,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안팎에서는 최근의 이 부회장 움직임을 두고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회사 내부적으로 대규모 투자 결정·임원 교체 등 변동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이 부회장의 결단력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한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현장에서 중지를 모아 (위기 타개책 등) 의견을 수시로 제시하는데, VIP(이 부회장)가 가타부타 결정을 해주지 않아 답답한 경우가 적지 않다”며 “VIP의 의중을 좀체 알지 못해 VIP 최측근들의 동향을 파악하며 움직여야 하는, 다소 비효율적인 소통 구조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러다 결정이 빠른 대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현장에서 느끼는 우려감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최대 라이벌은 대만 TSMC다. 5월24일 삼성전자는 대만의 간판 반도체 기업 TSMC를 뛰어넘어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시장 1위에 등극하기 위한 청사진을 밝혔다. 향후 5년간 시스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미래 먹거리 확보에 쏟아부을 돈은 450조원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선 TSMC를 추격하는 입장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모든 반도체 영역으로,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팹리스로부터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생산된 칩을 기기에 넣을 수 있는 상태로 가공하는 패키징 등으로 구성된다.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규격화·대량생산이 특징인 메모리 반도체보다 제품별 맞춤형인 시스템 반도체 수요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대만 시스템 반도체의 힘은 바로 파운드리와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TSMC에서 나온다.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인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의 전문성과 리더십 아래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제패한 TSMC는 2위 삼성전자를 완전히 압도한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8.3%, TSMC는 52.1%로 나타났다. 매년 투자해온 규모도 삼성전자에 비해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TSMC의 강력한 파운드리 경쟁력은 팹리스, 패키징 등 다른 분야 기업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대만을 시스템 반도체 강국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 톱10 기업 중 전년 대비 최고로 성장한 곳도 대만 팹리스 회사인 미디어텍(60% 성장)이었다.

모리스 창 리더십으로 우뚝 선 대만 반도체 

삼성전자 측이 시스템 반도체 투자 계획과 관련해 “파운드리와 팹리스 분야에서도 글로벌 선두로 나선다면 삼성전자를 하나 더 만드는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기대감 섞인 전망을 내놨지만, 외부의 일반적인 판단과는 온도차가 크다. 이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 일변도였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하는 점을 감안해도 시장 점유율 확대를 기대하기는 매우 힘들다”면서 “이미 시스템 반도체 선도국인 대만과 미국, 중국 등 다른 강국의 기업들이 똑같이, 아니 더 많이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임연구원은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를 안보·전략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인수·합병(M&A)도 반독점 이슈에 가로막히는 등 상황이 녹록지 않다”며 “우리나라 기업들이 비상한 전략으로 이 시기를 헤쳐 나가지 않으면 당장 5년 뒤 현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의 임원이 아닌 일반 직원들 역시 회사의 위기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기업 정보포털 잡플래닛의 삼성전자 직원 리뷰를 살펴보면 5월 들어 ‘내 목소리가 위로 전달되지 않는다’ ‘단기 성과를 내는 데 치중하는 경영진과 일반 직원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경영진이 이전의 성공만 추억하는 경향이 강하다’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계획을 제시하는 게 경영진의 역할인데, 계획 없이 매일같이 위기라고만 하는 통에 불안하다’는 등 회사의 리더십 문제에 대한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연구·개발 직군의 한 직원은 올 3월초 불거진 ‘게임 옵티마이징 서비스(GOS)’ 사태를 언급하면서 “삼성전자는 번지르르한 말에 비해 실상은 없는, ‘고인 물’이 돼가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GOS는 스마트폰 게임을 할 때 기기가 뜨거워지는 문제를 제어하고자 갤럭시 S22에 탑재한 기능이다. 하지만 GOS 가동 시 휴대전화 성능이 최대 60% 수준까지 떨어지고, 이 제한을 선택할 자유까지 박탈된 것에 대해 국내외 고객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분야는 물론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도 적신호가 켜졌다고 분석한다. 발열 문제의 원인인 퀄컴의 ‘스냅드래건 8 gen1’ 칩셋(AP)을 삼성 파운드리가 위탁생산해서다. 퀄컴이 다음 AP 생산을 삼성 파운드리에 맡기지 않으면서 위기는 현실화했다. 신작인 ‘스냅드래건 8 gen1+’의 위탁생산을 하게 된 곳은 다름 아닌 TSMC다. 

삼성전자가 국내 2위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에 밀리고 있다는 내용의 리뷰도 보였다. 생산·제조 직군의 한 직원은 “SK하이닉스와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선두를 빼앗긴 느낌”이라고 평했다. 익명을 요구한 SK하이닉스의 전직 임원은 “현시점에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은 오너의 빠른 결정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우 SK하이닉스 경영진, 이사회 등의 의견을 두루 청취한 후 결심이 서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즉각 결정해 줬다”고 말했다. 

 

매주 목요일 ‘종일 법원 출석’ 압박도 커 

한편 이 부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국정농단 뇌물공여 및 횡령)으로 2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뒤 지난해 8월 가석방됐으나, 취업 제한 논란 속 경영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이번 유럽 출장길에도 취업 제한 규칙 위반이 아니냐는 지적이 따라붙었다. 이 부회장에게 취업 제한 논란이 심리적 위축을 안긴다면 재판 출석은 직접적으로 경영상 제약을 가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태로 2017년부터 3년간 80여 차례 재판을 받았다.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관련 재판은 40여 차례 진행됐다. 그는 해당 재판 참석을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법원에 출석한다. 재판을 진행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가 지난 3월 외부회계감사법 위반 혐의 내용을 떼어내 삼정회계법인 재판과 병합함에 따라 이 부회장은 3주에 한 번씩 금요일에도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재판은 보통 오전 10시에 시작해 오후 6~7시까지 이어진다. 재판에 출석하는 날엔 이 부회장이 다른 업무를 전혀 보지 못한다고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은 전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비(非)메모리 반도체의 성장을 위한 선결 과제인 인재 양성, 생태계 조성 등도 결국 정부보다는 삼성전자의 역할에 달려있는 측면이 크다”며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들이 최전선에서 적확하게 결정하고, 같은 국가 내 기업들과도 오랜 기간 끈끈하게 공생해온 글로벌 경쟁사들에 비해 삼성전자의 걸음이 유난히 느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답답해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자와 2세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세, 네 번째)ⓒ삼성그룹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자와 2세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세, 네 번째)ⓒ삼성그룹

■ 이병철·이건희 결단으로 탄생한 삼성 신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유럽 출장을 떠난 6월7일은 선친인 이건희 회장이 29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新)경영’을 선언한 날이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전 세계 임직원들을 불러모아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일갈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요구했다. 웃음기 싹 뺀 살벌한 회의 현장 영상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향후 삼성이 질적 성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기업의 신화를 쓴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이 일본을 제치고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선 결정적인 계기도 이건희 회장이 만들었다. 1987년 4메가 D램 개발 경쟁이 붙었을 때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지, ‘트렌치(trench)’로 할지 선택해야 했다. 스택은 회로를 고층으로 쌓아올리는 방식이고, 트렌치는 밑으로 파내려가는 방식이다. 

개발진 사이에서 의견이 양 갈래로 나뉘었다. 전문경영인들은 처음 시도하는 기술인 스택 방식을 놓고 주저했다. 트렌치 방식에 무게가 실리려는 찰나 이 회장은 “단순하게 생각하자.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결정은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트렌치 방식을 택한 경쟁업체는 삼성전자에 밀려나게 됐다. 탄력을 받은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비트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1위에 등극한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시점은 창업자이자 이재용 부회장의 조부인 이병철 회장이 회사를 이끌던 1983년이다. 이병철 회장은 73세의 나이로 미국 실리콘밸리를 돌아본 뒤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기술이나 경험이 전무한 변방국 기업 삼성이 미국,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이 선점한 반도체 시장에 도전한다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사업 진출 1년 만에 대위기가 찾아왔다. 삼성이 겨우 양산하기 시작한 64킬로비트 D램의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기존 3달러에서 1달러80센트로 인하한 데 이어 일본 기업들도 저가 공세를 펼쳐 30센트까지 폭락했다. 삼성은 눈물을 머금고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다가 1984년 한 해에만 1300억원의 적자를 내게 됐다. 

‘지금이라도 반도체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사내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병철 회장은 “내 눈엔 돈이 보인다”고 말하며 오히려 생산라인 증설을 지시했다. 동시에 기술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기술력과 생산능력이 갖춰지고, 미·일 반도체 전쟁에 따른 반사이익 등 행운까지 따라주며 삼성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별세하던 해인 1987년까지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려고 시작한 것"이라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선대 회장들의 모습을 재연하거나 능가해야 하는 이재용 부회장이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짐은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 결단할 땐 결단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국내 최고 기업 수장으로서 이 부회장은 결단력부터 성과, 절실함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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