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극적인 반전은 없다…은퇴 고민에서 그랜드슬램 도전하는 전인지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7.02 11:00
  • 호수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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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스 PGA챔피언십 출전해 3년8개월 만에 우승컵 들어올린 ‘메이저 퀸’ 전인지,
8월에 또 하나의 역사 쓸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18번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끝내고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3년8개월 만에 우승한 뒤 ‘플라잉 덤보’ 전인지(28)는 ‘해냈다’는 생각, 그리고 ‘끝냈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속내를 털어놨다. 솔직히 안 울려고 했었다고. 하지만 그린에서도, 시상식에서 마이크를 잡고 우승 인터뷰를 할 때도 눈물샘은 그칠 줄 몰랐다. ‘아예 골프를 포기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될까’ 하고 생각했던 전인지가 슬럼프에서 벗어나 부활에 성공했다. 그것도 메이저 우승이라는 극적이고 화려한 부활이었다.

전인지는 6월27일(한국시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인 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총상금 900만 달러)에서 정상에 올랐다. 합계 5언더파 283타를 쳐 막판 추격한 공동 2위 이민지(호주), 렉시 톰슨(미국)을 1타 차로 따돌리고 진땀승을 거뒀다. 우승상금으로 135만 달러(약 17억4879원)를 받았다. 1라운드에서 무려 8언더파 64타를 친 것이 주효했다. 

ⓒAP 연합
6월27일(한국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베세즈다의 콩그레셔널CC에서 막을 내린 LPGA투어 시즌 세 번째 메이저대회인 여자 PGA챔피언십에서 전인지가 우승을 확정 짓는 퍼트를 성공시킨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AP 연합

박세리-박인비 이을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다 ‘추락’

사실 전인지가 2015년 US여자오픈에 초청받아 비회원으로 우승했을 때만 해도 박세리(45), 박인비(34)를 이을 차세대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2010년 국가상비군, 2011년 국가대표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쳐 2013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원 자격을 따내며 투어에 데뷔했다. 175cm의 체격조건과 멘털 갑으로 중무장한 전인지는 US여자오픈과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메이저대회인 살롱파스컵, KLPGA투어 메이저대회 하이트진로 챔피언십에서도 정상에 올라 한 시즌에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2016년 LPGA투어에 무혈입성해 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기량을 발휘했다. ‘루키’ 전인지는 2016년 메이저대회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상금랭킹 4위에 오르며 신인상과 최저타수상(69.58타)을 획득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7년에도 우승은 없었지만 준우승만 5차례 하는 등 상금랭킹 11위에 오르며 물오른 기량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승 문턱을 넘지 못한 탓인지 2018년부터 상승세가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LPGA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뿐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LPGA투어가 파행 운영된 탓도 있지만 전인지의 날카로운 샷감은 점점 무뎌져갔다. 2020년에는 톱10에 단 두 차례 들었을 뿐 우승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추락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진로까지 고민해야 했다. 그 자신도 알았다. 스윙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프로는 모든 샷을 스코어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왜 안 되지?’ 하는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조급해졌다. 이것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결과를 내지 못하면서 스스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골프를 잠시 내려놓으면서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요리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등 취미생활을 하면서 운동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던 게 오히려 골프에 대한 열정을 되돌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여기에 대회를 앞두고 결정적인 ‘사건’ 두 개가 일어났다. 먼저 언니다.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전인지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미국에 있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온 말은 “골프만큼이나 너도 소중하니 그만두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울고 나니 전인지는 ‘골프를 하고 싶다’는 것을 더 강하게 느꼈다. 결정타는 자신의 골프 지도를 맡고 있는 JTBC 박원 해설위원의 말이었다. “요즘 경기를 보니 샷에 ‘영혼’이 실리지 않은 것 같다”며 “이럴 거면 은퇴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전인지에게는 뼈를 파고드는 비수 같은 한마디였다. 

ⓒAP 연합
전인지가 6월27일(한국시간) 여자 PGA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AP 연합

박인비에 이어 두 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도전

전인지의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우승은 나름대로 코스 공략과 클럽 선택의 전략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자신의 약점을 최대한 줄이고 유리한 강점을 골랐다. 여기에 유연한 멘털까지 그를 승자로 만든 것이다. 비록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지만 최종일 전반을 끝내고 톰슨에게 역전당한 것을 보면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2위에 3타 차 앞서며 선두로 나섰던 최종일 4라운드 경기에서 전인지는 전반 9홀 동안 오히려 톰슨에게 2타 차로 역전당한 상황이 됐다. 그런데 항상 막판 고비를 못 넘기고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곤 했던 톰슨의 징크스는 이날도 반복됐다. 버디 2개에 보기를 4개나 범하는 실수를 연발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전인지는 버디 2개, 보기 1개로 재역전에 성공했다.

 전인지는 호기심이 많고, 욕심 또한 적지 않다. 부친이 사업을 하다가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힘겹게 골프를 한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골프 실력을 키워갔다. 주니어 시절 그의 기량을 알아본 군산의 한 골프장 오너가 마음껏 연습하라고 코스를 내주기도 했다. 부모가 빚을 갚기 위해 건설노동자를 대상으로 음식장사를 하느라 매우 바빴을 때도 그는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클럽을 휘둘렀다. 전인지는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이 때문일까. 그는 남을 돕는 일도 소리 소문 없이 한다. 

2015년 랭커스터 컨트리클럽(LCC)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자마자 LCC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캐디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는 ‘전인지 LCC 장학재단’을 설립해 기부하고 있다. 또한 모교인 고려대에서 1억원의 기부금으로 ‘전인지와 함께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특히 고려대 13학번인 그는 귀국해 공식 일정을 빼놓고는 학교로 향했다. 공부도 재미가 있었지만 학우들과 만나 수다를 떨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던 것이다.

 이번 전인지의 우승으로 한국은 김아림(27·SBI저축은행)이 2020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한동안 없었던 ‘메이저 왕관’을 다시 찾아왔다. 그동안 한국 여자골프는 19명의 선수가 메이저대회 35승을 달성했다. 메이저대회 3승 이상을 한 선수는 박인비, 박세리에 이어 전인지가 세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전인지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메이저대회 3승을 챙겼으니 하나의 우승을 더 추가해 ‘커리어 그랜드슬램’(메이저대회 5개 중 4개 대회 이상 우승)을 달성하는 것이다. 지금껏 커리어 그랜드슬램 대기록은 국내에선 박인비가 유일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7명뿐이다. 오는 8월4일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전인지가 6월27일(한국시간) 여자 PGA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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