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상상력의 스펙터클, 영화 《놉》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8.27 15:00
  • 호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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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 《어스》로 전 세계 열광시킨 조던 필 감독의 신작

이게 무슨 얘기야? 극장에서 이제 막 《놉》을 보고 나온 당신의 첫마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겟 아웃》(2017), 《어스》(2019)를 통해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심리학적 소재, 독창적인 방식의 시각적 공포를 함께 버무리는 재주로 전 세계를 열광시킨 조던 필 감독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UAP(Unidentified Aerial Phenomenon·미확인 공중 현상)가 중심 소재다. SF와 서부극, 공포와 코미디, 기존 걸작들의 오마주 장면까지 방대한 상상력이 자유분방하게 섞인 이 작품은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스크립트라는 점에서 우선 놀라움을 안긴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보았는데도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은 뒷맛을 남기는 이 영화. 대체 정체가 뭘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놉》 포스터ⓒ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할리우드의 역사 뒤집기, 스펙터클의 민낯 고발하기

OJ(다니엘 칼루야)는 헤이우드 목장의 말 조련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말(馬)을 관리해 영화와 광고 등의 촬영장에 조달해 왔고, 자신들이 할리우드 영화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일어난 기현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목장의 운영 책임은 OJ와 동생 에메랄드(케케 파머)의 몫으로 남지만, 컴퓨터 그래픽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를 전부 만들어내는 시대에 가문의 역할은 예전 같지 않다. 오빠와 달리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유명해지는 데 목마른 에메랄드는 이상 현상을 촬영해 방송국에 제보하자는 적극적인 아이디어를 낸다.

‘그것’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헤이우드 남매는 할리우드의 유명 촬영감독(마이클 윈콧), 목장에 카메라를 설치한 마트 점원(브랜든 페레야)과 함께 UAP 포착을 위한 사투를 준비한다. 목장 근처에는 카우보이를 테마로 한 놀이동산 ‘주피터 파크’를 운영하는 리키 주프 박(스티븐 연)도 있다. 그는 과거 유명 TV 프로그램에 어린이 배우로 출연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 역시 하늘에서 기현상을 목격한 뒤로, 이를 자신의 쇼에 접목해 화제를 모으려 궁리 중이다.

헤이우드 가문과 할리우드, 미확인 공중 현상과 서부극이라는 장치는 언뜻 서로 연결되지 않을 듯 보이지만 극 안에서 긴밀한 연결점을 가진다. 우주 공간에서 온 ‘그것’은 인간부터 땅 위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기세로 빨아들인다는 점에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다. 바꿔 말하면 착취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서부극의 민낯과 공통점을 지닌다. 서양의 역사는 개척사회의 신화로 쓰여 왔지만 실은 토착민을 내쫓고 폭력으로 새롭게 써내려간 역사일 뿐이다. 그리고 서부극은 이 ‘착취의 역사’를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탈바꿈해 소비하게 만든 대표적 장치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유지된 방식이기도 하다.

헤이우드 남매는 촬영 현장의 관계자들 앞에서 1887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만든 활동사진을 중요하게 언급하곤 한다. 마이브리지의 이름은 남았지만 활동사진 속 말을 타고 달리는 흑인 기수의 이름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들이 그 후예라는 것이다. 《놉》은 그렇게 그동안의 영화적 유산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누락되고 잘못 기록된 것들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꼬집는다. 그간 당연한 듯 배제됐던 역사 속 흑인 남매가 가장 할리우드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활력 넘치게 맞서는 과정은 통쾌하며 인상적이다.

그러나 조던 필은 이들의 행적을 쉽사리 영웅화할 생각이 없다. ‘그것’을 포착하려는 OJ 남매의 바람은 점차 이미지를 향한 과욕으로 치닫는다. 기술 때문에 할리우드 카메라 앞에서 점차 외면받는 이들이 돈을 벌려는 수단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다. 에메랄드가 유명 촬영감독까지 팀원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다. 현장의 베테랑인 그도 새로운 것을 포착하고픈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할리우드 생리는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착취와 그것에 무비판적으로 열광하는 이들로 인해 유지된다. 미디어와 결속해 명성을 얻고 싶은 사람들, 서로를 구경하는 존재들, 착취로 돈을 벌려는 이들까지 OJ 남매와 주프 등 모든 인물이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시대를 대변한다.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려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영화가 제시하는 나홈 3장 6절의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1977)부터 《아키라》(1988), 《에반게리온: 서》(2007) 등까지 방대한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감독 특유의 방식 역시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겟 아웃》에서는 사냥당하는 사슴, 《어스》에서는 복제된 또 다른 ‘우리’를 상징했던 토끼, 《놉》에서는 말이 상상력의 씨앗이 된다. 동물뿐 아니라 본래 용도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물건으로부터 발휘되는 기이한 힘도 여전하다. 《겟 아웃》의 목화솜, 《어스》의 가위에 이어 《놉》의 말 모형과 거대 풍선 인형 등이 영화의 결정적 디테일들을 뒷받침한다.

영화 《놉》 포스터ⓒ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나쁜 기적’은 있을까?

기적은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잠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거슬러 가보자. 《놉》은 조금은 의외의 장면으로 문을 연다. TV 쇼를 촬영 중인 세트장은 쓰러져 죽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가득하다. 발작을 일으킨 침팬지의 소행이다. 난장판이 된 스튜디오 바닥에는 누군가의 신발 한쪽만 멀쩡하게 세로로 세워져 있다.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던 침팬지는 이내 카메라와 눈을 맞춘다. 점점 다가오는 침팬지, 화면은 이내 헤이우드 목장의 풍경으로 전환된다. 이 침팬지가 인기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던 ‘고디’이며, 당시 스튜디오에서 고디의 살육으로부터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인물이 어린 주프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드러나는 정보다. 첫 장면에서 침팬지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주프의 시점이다.

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둔 듯 스튜디오에 꼿꼿하게 서있던 신발은 주프의 입장에서는 ‘기적의 증거’였다. 그는 마치 박물관에서 고대 유물을 대하듯 이를 귀하게 보관한다. 그러나 당일 침팬지의 공격으로 사망한 이들과 사살당한 동물이 흘린 피로 얼룩진 녹화장의 풍경은 기적이 아닌 저주의 그것에 가깝다. 저주를 기적으로 믿었던 주프는 자신이 다시 한번 그 주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에 빠진다. 그런 그가 맞는 최후는 처참하다.

첨예한 인종과 계급 문제에서 약간은 벗어난 SF 활극을 만들었지만, 이처럼 조던 필 감독의 영화는 여전히 관점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놉》의 포스터가 《죠스》(1975)의 포스터를 오마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죠스》의 포스터에서는 포식자(상어)가 인간을 곧 삼킬 듯이 올려다보고 있지만 《놉》에서는 인물들이 ‘그것’이 존재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놉》의 시도는 ‘직시하기의 거부’라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이따금씩 등장하는 테마와도 유사한 연결점을 갖는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눈을 가리는 인물들의 이야기 《버드 박스》(2018), 행성의 지구 충돌 현실을 무시하는 이들을 냉소하는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2021)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거나 그러기를 거부한다는 것. 이것이 동시대 영화가 포착하고 있는 오늘날의 풍경 중 하나라는 점은 확실히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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