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의 나비효과...‘등(等)’이 만든 틈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2.08.27 10:00
  • 호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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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헌의 한 글자 때문에 벌어진 갈등의 역사...협치 위한 여백인가, 권력 위한 포석인가

‘등(等).’ 명사 뒤에 쓰여 ‘그 밖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한 가지 뜻이 더 있다. ‘두 개 이상의 대상을 열거한 다음에 쓰여 대상을 그것만으로 한정하는 말’이다. 이 애매모호한 글자 하나가 국정에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등’이란 글자는 최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설립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준석 전 대표가 6개월 당원권 정지 처분을 받고 권성동 원내대표의 ‘문자 파동’이 이어지자 당내에선 비대위 출범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비대위 출범 근거는 국민의힘 당헌 96조 1항이다. 여기에는 “당 대표가 궐위되거나 최고위원회의의 기능이 상실되는 등 당에 비상상황이 발생한 경우, 안정적인 당 운영과 비상상황의 해소를 위하여 비대위를 둘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박은숙·국회사진취재단

‘당원권 정지=비상상황?’…입맛대로 해석

‘궐위(闕位)’는 직위가 빈 상황을 뜻한다. 당과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당원권이 정지되면 당무를 보지 못한다. 대신 직위는 유지하게 된다. 즉 당원권이 정지된다고 해서 곧장 궐위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민의힘 측은 이를 ‘궐위에 준하는 상황’으로 해석했다. 또 이를 비대위 출범 배경으로 삼기 위해 당헌 96조 1항의 ‘등’에 주목했다. ‘등’을 ‘같은 종류가 더 있음’이란 뜻으로 받아들여 궐위에 준하는 상황 역시 비상상황에 속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전 대표는 반발했다. “당헌상 비상상황은 당 대표 궐위와 최고위 기능 상실이란 두 가지 경우만을 뜻한다”는 주장이다. ‘등’을 한정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서 “궐위에 준하는 상황이란 말은 (당헌에)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이 전 대표의 반대에도 국민의힘은 8월16일 비대위를 출범시키고 주호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등’이 낳게 될 혼란은 여전히 잠재돼 있다. 39쪽짜리 국민의힘 당헌에서 ‘등’이란 글자가 포함된 조항은 총 49개다. 이 가운데 당규로 구체화된 내용을 제외하면 40개 조항이 해석상 이견을 빚을 소지가 있다. 특히 당 대표 선출 절차와 당내 최고 권한인 공천권을 규정한 조항은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해당 조항은 아래 그림 참조)

 

이 중 83조 3항의 경우 ‘친·인척 등 특수관계’가 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비례대표 공천위원이 공천신청자의 친족은 아니지만 노사 관계 또는 채권 관계에 있다면, 이를 특수관계로 볼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86조 2항 1조 역시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이와 비슷한 조항이 실제 큰 갈등으로 번져 권력추를 움직였다는 분석도 있다.

2016년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에서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친박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 충돌한 적이 있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이 위원장이 “전국 모든 광역시·도에 최소 1곳의 우선추천지역을 두겠다”고 밝히면서다. 새누리당 당헌 103조는 우선추천지역에 대해 ‘여성·장애인 등 정치적 소수자의 추천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역’이라고 규정했다. 국민의힘 당헌 86조 2항 1조에서 ‘청년’만 빠진 문구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여성과 장애인 외에 우선추천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이 위원장은 “기준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 이면에는 우선추천지역을 빌미로 친박계와 비박계가 입맛에 맞는 후보를 꽂으려 한다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당헌에 등장하는 ‘등’…국힘 49개, 민주 84개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갈등은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김 대표가 공천 추천장에 직인 찍기를 거부하고 잠적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른바 ‘옥새파동’이다. 결국 한 달 뒤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민주당에 제1당 자리를 내주며 참패했다. 이를 두고 ‘등’에 대한 해석 차이가 치명적 내홍을 야기했다는 시각이 짙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당헌에 ‘등’이 들어간 조항은 84개로 국민의힘보다 더 많다.

국립국어원은 ‘등’에 대해 문맥에 따라 해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만 해석할 때 팁이 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게시판에 따르면, ‘등’이 한정적 의미로 쓰일 경우 대체로 그 뒤에 몇 개의 대상으로 한정되는지 명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주요 전투는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등 3대 대첩”이란 문장에서 ‘등’은 ‘3대 대첩’이란 표현 앞에 따라 나와 설명 대상을 한정한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시 “‘등’이 한정적 의미로 쓰이려면 그 조건이 분명히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그 조건이 분명하지 않다면 설명 대상을 더 포함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적용해도 문제의 국민의힘 당헌 96조 1항은 여전히 애매하다. ‘비상상황’이란 조건을 적시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아서다.

일단 국민의힘은 상임전국위원회를 통해 “현재 상황은 비상상황”이란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 전 대표는 상임전국위원회 유권해석의 효력정지와 주호영 비대위원장의 직무집행정지를 요청하는 법원 가처분을 신청했다. 서울남부지법은 8월26일 유권해석 효력정지 신청은 각하하되 주 위원장의 직무집행정지 신청은 받아들였다.

애초에 당헌을 만들 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게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률가는 “‘등’이 아닌 ‘중’을 써서 한정적 의미를 명확히 하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당의 헌법인 당헌을 그때그때 권력자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정치권 관계자는 “정무적 해석이 필요한 당헌을 법률적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며 “당헌은 여러 선례와 협의의 정치에 의해 보완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률에 적힌 ‘등’도 갈등의 서막을 열었다. 법무부는 검찰의 직접 수사개시 범위를 부패·경제범죄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게 가능한 배경은 국회가 지난 4월 통과시킨 검찰청법 개정안에 있다. 개정안 4조 1항 1조는 “부패범죄, 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를 검사의 수사개시 범위로 규정해 놓았다. 법무부는 이를 폭넓게 해석한 것이다. 야당과 경찰은 “입법 취지 훼손”이라며 비판했다. 검찰 수사권 축소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가치였던 만큼 전임 정권과의 충돌이 또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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