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불평등은 우리 사회에서 정말 사라진 걸까 [남인숙의 귀여겨듣기]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3 08:05
  • 호수 17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양성평등 순위 146개국 중 99위…그런데도 성차별 없어졌다고 보는 시각 많아
유일한 전담 기구인 여성가족부마저 폐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며 어깨와 허리를 혹사하는 필자는 마사지 받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온갖 종류의 마사지를 경험해 보았고, 부위별 마사지 기구도 대여섯 가지 갖고 있다. 그런 필자가 오래전부터 의아해하던 것이 안마의자였다. 분명히 전신 마사지를 표방하는 물건이고 따로 다리와 발을 관리하는 코스까지 있는데, 제법 좋다고 소문난 것에 앉아보아도 발 마사지가 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기능이 부실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안마의자라는 게 원래 그런 종류의 물건이려니 여겼다. 그러다 몇 년 전 한 안마의자의 제품 설명서를 자세히 보다가 오랜 의문을 풀게 되었다. 제품이 173cm 내외의 신장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여성 평균 키보다 조금 큰 정도인 필자가 아무리 설정을 바꿔도 발 마사지가 되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남성 평균 키에 맞게 나온 그 기계의 아랫부분에서 홀로 공회전하고 있는 마시지 회전볼에 다리가 짧은 필자의 발바닥이 닿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전국 195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0월15일 서울 종각역 사거리에서 여가부 폐지 철회와 성평등 추진체계 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뉴스1

‘작은 이득’이 쌓아놓은 권리의 벽 엄청나

이처럼 세상에는 여성에게는 닿지 않아 존재조차 모르고,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해 양쪽 모두에게 인지되지 못하는 것이 수없이 많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의학 연구도 남성 신체 위주로 이뤄진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적용하는 의학적 처치는 남성에게 더 적합하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사례의 80%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나 성별 간 신체 차이를 고려한 의학적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종(種)을 대표하는 진정한 인간으로 군림해온 남성은 물론 여성들도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는 세상의 혜택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미국의 인지과학자 버지니아 밸리언은 이런 현상을 ‘이익 축적 이론’으로 설명했는데, 한 가지씩만 보면 별것 아닌 이득이 쌓여 엄청난 차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각개의 이득이 작고 당연하기에 인식하기가 어렵지만, 그 결과로 쌓아놓은 권리의 벽은 엄청나게 커서 성별 간 평등이 이뤄지기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안마기 발 마사지 이야기를 불평등의 근거로 들어 따지고 들면 별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는다는 비난과 함께 기계가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기술적 이유까지 들이대며 납득을 강요받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삶 전체에 이런 ‘닿지 않는 회전볼’이 존재한다면 어떻겠는가.

지난여름, 필자는 에어컨을 켠 채 부엌일을 하는데도 너무 덥다고 느꼈다. 대체 왜 그런가 했더니 주방 천장의 매립식 시스템 에어컨이 조리대가 아니라 식탁 쪽으로 바람이 가도록 설치돼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불을 다루는 주부가 아니라 가만히 앉아 식사를 할 사람의 땀만 식혀주는 구조다. 물론 설계한 ‘그 누군가’가 주부들이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주방일을 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 배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 역시 주방일을 도맡아 하는 여성이었을 수도 있다. 그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여성들이 몰려 있는 영역이 인식 밖으로 자연스럽게 떠밀려 나갔을 뿐이다.

예민해져야만 알 수 있는 수많은 ‘작은 이득’을 이제 여성들이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면서 남성들과 동등하게 나누려 하고 있다. 원래 인간은 심리적으로 이득의 기쁨보다는 손실의 아픔을 훨씬 크게 느끼게 돼있다. 남성 입장에서는 이미 당연하게 자신 쪽으로 기울어 있던 세상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게 엄청난 상실로 느껴질 것이다. 이미 이익 축적으로 거대하고 단단한 성 위에 올라가 있는 이들에게 조금씩 담을 헐어오는 이들의 도발이 부당해 보일 것은 당연하다.

 

강력범죄 피해자의 85.8%가 여성인 사회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 발표에 따르면 경제·교육·건강·정치권력 등에서 양성이 동일 가치를 얻게 되는 시점을 100년 안쪽으로 내다봤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으면 남은 기간이 줄어들었어야 마땅한데 올해 같은 기관의 보고서 예측치는 132년으로 오히려 더 늘어났다. 코로나19로 경제적 약자인 여성이 고용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성평등은 전 세계적으로 갈 길이 멀지만, 우리 사회가 유독 다른 면이 있다. 전반적으로 차별이 없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 다른 나라보다 양성평등에서 앞섰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WEF의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46개국 중 99위로 하위권이다. 그중 고위직 여성 비율 통계를 보면 무려 125위다. 만약 평등이 이뤄지는 시점을 한국만 따로 계산하는 데이터가 있다면 다음 세기에도 어렵겠다는 기대치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우리 사회에서 여성가족부 폐지가 정부안으로 확정되었다. 이제 양성평등을 전담하는 기구가 한국에는 없는 셈이다. 비교적 양성평등이 이뤄졌다고 평가받는 선진국들이 대부분 전담 기구를 두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강력범죄 피해자 2만2471명 중 85.8%가 여성이었던 사회에서 불평등이 없다며 전담 부서를 없앤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축적된 작은 이득을 내주며 상처받는 이들을 부추겨 표를 얻을 게 아니라, 작은 이득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함께 가는 것을 설득하는 게 맞다. 따로 예산을 배정받고 독자적으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전담 기구가 필요한 이유다.

다시 안마의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최근 지인을 따라 들어간 쇼룸에서 필자는 처음으로 회전볼이 발바닥에 닿는 안마의자에 앉아볼 수 있었다. 썩 시원하지는 않아도 분명 발 마사지 기능의 존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국내에서 판매하는 것 중 가장 비싼 모델이었다. 이제 여성들이 누리지 못하던 작은 이득을 인지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너무나 비싸다. 그래서 남성과 같은 것을 여성이 누리려고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작은 이득’이 아니다.

남인숙 작가
남인숙 작가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