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부호 50명, 9개월 만에 27조원 증발했다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5 10:05
  • 호수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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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대 기업 오너 일가 1902명 주식 가치 전수조사
1조원 주식 부호 수는 26명→14명으로 크게 감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일가 1~4위 독식
김범수·방시혁·장병규 등 신흥 부호도 10위권 안착

세계적인 통화·재정 긴축 추세 강화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세계경제가 유례없이 얼어붙고 있다. 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로 주식시장에 한파가 들이닥쳤다. 연일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투자자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식 부호로 꼽히는 재벌 총수들은 어떨까.

시사저널은 매년 기업 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와 주요 상장기업 오너의 주식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올해 상장기업 총수들의 주식 가치를 분석한 결과, 주식 부호 상위 50명의 지분 가치가 연초 대비 27조원 이상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 가치가 조(兆) 단위로 증발한 오너도 한둘이 아니다. 유례없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폭락장 앞에서 개미투자자뿐 아니라 재벌도 맥을 못 추고 있다.

올해 주식 부호 1위는 예상대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필두로 한 삼성그룹 일가(27조29억원)가 차지했다. 9월29일 종가 기준 이재용 부회장의 주식 가치는 10조915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1월31일 종가 기준 14조1767억원 대비 23% 하락한 수치다. 그래도 대기업 총수 중 10조원이 넘는 주식 가치를 보유한 이는 이재용 부회장이 유일하다. 그 뒤를 이어 이 부회장 어머니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6조3613억원)과 동생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5조1886억원),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4조5378억원)이 주식 가치 순위에서 나란히 2·3·4위를 차지했다.

ⓒ일러스트 신춘성

주식 부호 순위, 삼성·현대·카카오 순

하지만 마냥 웃을 수는 없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이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먼저 수익성에 비상등이 켜졌다. 올해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31.7% 감소한 10조8000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지난해 동기 대비 매출은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크게 감소했다. 특히 영업이익의 경우 2019년 4분기 이후 약 3년 만에 전년 동기 대비 역성장을 기록했다. 코로나19 특수가 사라진 데다, 고물가와 고금리로 인한 정보기술(IT) 세트 수요가 줄어들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 역시 급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흐름은 올 4분기에 이어 내년까지도 지속될 전망이다. 영업이익의 가장 큰 부분을 반도체에 의존했던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분석된다.

2위는 현대자동차그룹 일가(6조9476억원)가 차지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3조8634억원,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3조841억원인 것으로 집계됐다. 두 사람의 주식 가치는 올해 초 대비 각각 19%, 11% 하락했다. 다만, 현대차와 현대글로비스 주가는 다른 상장기업들보다 하락세가 크지 않아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히려 정의선 회장의 주식 가치 순위는 지난해 시사저널 조사보다 한 단계(8위→7위) 상승했다.

올해 현대차는 글로벌 경기 하락 상황에서도 탄탄한 실적으로 순항 중이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의 올 3분기 매출액은 35조1341억원, 영업이익은 2조9482억원으로 추정된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액은 21.71%, 영억이익은 83.5% 늘어난 수치다. 기아차의 3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도 전년에 비해 각각 24.88%, 69.39% 늘어난 22조1692억원과 2조2478억원으로 예상됐다. 3분기는 전통적으로 자동차가 잘 팔리지 않는 비수기로 꼽히지만,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 완화와 달러 강세, 미국 판매 호조 등이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올해 조사에서 주목할 점은 상장기업 오너들의 주식 가치가 크게 하락했다는 것이다. 상위 50명 주식 부호의 지분 가치 총액은 1월3일 기준 87조원이었지만, 9월28일 기준으로 따졌을 때 59조원으로 집계됐다. 1년도 안 돼 상장기업 오너들의 주식 가치가 31%나 급락한 것이다. 1조원 이상 주식 부호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지난해 시사저널 조사에서 1조원 이상 주식 부호는 총 26명이었지만, 올해는 14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50명 주식 부호 중 주식 가치가 상승한 사람은 12명뿐이다. 나머지 38명은 주식 가치가 모두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지난해 주가가 역대 최고점을 찍은 것과 비교되는 조사 결과다”면서 “올해 들어 대외적인 경제위기로 주식시장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개미투자자들도 주가 하락으로 뼈아프지만, 주식 부호들 또한 이런 시장의 흐름을 피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재벌 총수들도 못 피해 간 폭락장

주식 부호 3위를 차지한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는 주식 재산이 가장 많이 줄어든 총수 중 한 명이다. 그의 주식 가치는 3조3044억원으로 집계됐다. 올해 초 파악한 6조7985억원과 비교했을 때 3조4640억원이나 하락한 것이다. 김 창업자의 주식 가치는 9개월 만에 51%나 떨어지면서 그야말로 반 토막이 났다. 지난해 시사저널 조사와 마찬가지로 김 창업자는 주식 부호 3위 자리를 지켰지만, 이 같은 주가 폭락은 뼈아플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카카오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서비스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면서, 리스크가 가중되는 형국이다. 10월19일 대국민 사과에 나선 남궁훈 카카오 각자대표는 이번 서비스 먹통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까지 했다. 한동안 추진 동력을 잃었던 대형 플랫폼 갑질 규제법안인 ‘온라인플랫폼공정화법’(온플법)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부각됐다는 점도 카카오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지난해 주가 급등으로 신흥 주식 부호 반열에 올랐던 성장기업 총수들도 주가 급락으로 속이 쓰리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4조6095억원에서 2조5367억원으로 2조8735억원(-62%) 하락해 주식 가치 하락 폭이 가장 컸다. 뒤이어 방준혁 넷마블 의장은 2조6430억원에서 1조1090억원(-58%),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은 3조2814억원에서 1조4659억원(-55%),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1조7538억원에서 8790억원으로(-50%) 지분 가치가 하락했다.

특히 게임 기업들의 주가가 크게 하락했는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강도 긴축 정책에 직격탄을 맞으며 낙폭이 확대된 것으로 분석된다. 게임주는 통상 성장주로 금리 인상 시 미래 가치에 대한 할인율이 높아져 주가가 약세를 보이는데, 연준이 내년 상반기까지 강도 높은 긴축 정책을 내놓으면서 상승 동력을 잃었다. 국내 게임시장의 성장이 여의치 않은 점도 투자심리를 악화시켰다. 국내 게임시장은 모바일 위주로 성장이 제한적이며, 최근 확률형 아이템에 의존해 과금하는 방식에 이용자들의 반감이 커지고 있다. 실적에도 먹구름이 끼면서 당분간 게임주들의 주가가 횡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경제신문 뉴스뱅크이미지·연합뉴스·고려아연 홈페이지

조현범 회장 주식 가치, 226% 폭등 

반면 하락장 속에서도 지분 평가액이 크게 증가한 총수도 있었다. 조현범 한국테크놀리지 회장이 대표적이다. 조 회장의 보유 주식 평가액은 올해 초 1048억원에서 3420억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지난 9개월 동안 무려 226% 폭증한 셈이다. 50대 주식 부호 중 주식 가치가 이처럼 널뛰기한 사람은 조 회장이 유일하다. 덕분에 조현범 회장의 주식 부호 순위는 지난해 시사저널 조사 때보다 다섯 단계(34위→29위)나 상승했다.

조현범 회장은 한국타이어 단독 경영에 나선 지 6개월이 넘었다. 2020년 조양래 한국타이어 명예회장은 차남 조현범 회장에게 지분 23.59% 전량을 양도했다. 이후 다른 형제들의 반발로 ‘형제의 난’이 불거졌지만, 올해 초 형인 조현식 전 부회장이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갈등이 마무리됐다. 지난 5월 조양래 명예회장이 주요 계열사인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지분 5.67% 전량을 조 회장에게 증여하면서 지분 승계가 모두 마무리됐다.

이 밖에도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의 지분 가치도 올해 초 4612억원에서 5920억원으로 상승했다. 올해 초 2만4000원대였던 현대해상 주식이 3만3000원대로 오른 상태다. 실적 개선과 최근 세계 주요국의 금리 인상이 이어지면서 보험 업종이 최대 수혜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올해 예상 순이익은 5611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28% 증가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외에 주식 가치가 상승한 오너는 홍석조 BGF그룹 회장(14%), 함영준 오뚜기 회장(6%), 김남호 DB그룹 회장(5%) 등 6명이다.

이번 주식 부호 조사에서 중견기업 오너들의 약진도 도드라졌다. 조영식 에스디바이오센서 회장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16위)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18위) 등 대기업 오너들을 제치고 주식 부호 15위를 차지했다. 조 회장의 보유 주식 가치가 8884억원으로 올해 초 대비 50%가량 하락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와 더 주목된다. 지난해 코스피에 상장한 에스디바이오센서는 코로나19 진단키트로 유명하다. 지난해 매출 2조원 시대를 연 에스디바이오센서의 경우 지난 1분기에 1조3884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2분기에도 증권사 추산 7500억원대 매출이 예상돼 2년 연속 2조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점쳐진다.

김성권 씨에스윈드 회장도 주식 부호 순위가 크게 올랐다. 지난해 주식 부호 순위에서 29위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18위를 차지했다. 씨에스윈드는 풍력타워 부문 글로벌 1위 기업이다. 올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IRA) 법안 등 정책 호재에 힘입어 주가가 크게 상승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한 미국 풍력시장 확대와 보조금 수령과 함께 글로벌 해상풍력 시장이 커지면서 씨에스윈드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이 외에 상반기 대비 하반기 주식 가치가 상승하면서 합금 제조기업 고려아연(12%)과 자동차 부품기업 에스엘(4%)의 오너 일가들이 주식 부호 상위 50위 안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에스엘은 올해 초부터 3만원대 주가에서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지만, 이성엽 에스엘 대표이사(27위·4056억원)와 아버지 이충곤 전 에스엘 회장(42위·2240억원), 동생 이승훈 전 에스엘미러틱 사장(49위·1800억원)이 주식 부호에 이름을 올렸다. 고려아연은 올해 초 50만원대였던 주가가 60만원대까지 올랐으며, 최윤범 고려아연 부회장(43위·2248억원)을 포함해 총 4명의 오너 일가가 상위 50위권 안에 있다. 이 외에 장형진 영풍 회장(24위·4277억원), 천종윤 씨젠 대표이사(35위·2562억원) 등이 처음으로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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