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성대한 여정, 현대에 따라 걷다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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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정조대왕 능행차’, 세계기록유산 등재된 기록 따라 재현
상업·유행 쫓지 않고 다채롭게 구성…문화관광적 가치 제고
조선의 역대 임금들이 수원에 행차할 때 머물던 궁궐.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였으며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김지나
조선의 역대 임금들이 수원에 행차할 때 머물던 궁궐.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였으며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김지나

1795년 2월, 정조대왕은 창덕궁을 떠나 수원 화성에 위치한 행궁으로 향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서였다. 연회 장소로 가기 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현 융릉)’을 찾아 참배를 했으며, 혜경궁 홍씨는 이날 사별 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의 묘를 찾았다. 훗날 ‘정조대왕 능행차’라 불리게 된, 장장 8일 동안 이어진 성대한 여정이었다.

이 모든 내용은 정조의 명에 따라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8권의 책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의궤란 조선시대 왕실 혹은 국가에서 행해졌던 큰 행사의 절차와 내용을 하나부터 열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다. 사람은 얼마나 동원이 됐는지, 어떤 행렬로 배치됐는지, 재물은 어떤 것들이 사용됐는지, 무슨 의식을 어떻게 치렀는지 시시콜콜히 알 수 있다.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묘사돼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정조대왕의 화성행차 기록에는 무려 5000명 이상의 왕실 수행원들과 1500여 필의 말이 등장한다. 행사 내용을 정리하는 데만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과연 ‘기록의 나라’라 불리는 조선답다. 실제로 조선왕조의 의궤는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매년 10월 열리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 주요 배역들과 출연진은 모두 일반 시민들이다. ⓒ승마동호회 프리런
매년 10월 열리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 주요 배역들과 출연진은 모두 일반 시민들이다. ⓒ승마동호회 프리런

역사 고증과 재미 고루 챙긴 ‘범지역적’ 축제

지난 10월 초, 이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하는 행사가 이틀에 걸쳐 열렸다. 본래 1996년 수원시가 화성 축성 200주년을 기념하며 단독으로 시작했던 행사다. 그랬던 것이 2017년부터 서울시, 수원시, 화성시, 경기도가 공동주최하며 약 60km에 달하는 행차의 역사를 현대에 되살리고 있다. 그밖에도 금천구, 안양시, 의왕시, 군포시 등 왕의 행렬이 지나갔던 길목에 있는 여러 자치단체들이 행사가 원활히 진행되는 데 함께 기여했다.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범지역적 축제다.

정조대왕 능행차는 그 옛날에도 그랬듯 시민들이 주인공인 행사였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시민들은 3년 만에 다시 맞은 축제 행렬을 보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주요 등장인물인 정조대왕,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대왕의 동생인 청연공주와 청선공주 역할은 시민들 가운데서 오디션을 거쳐 선발됐으며, 말을 타야 하는 군대와 호위병은 승마 동호회들을 통해서 동원됐다고 한다.

정조대왕 능행차는 행렬의 순서며 구성, 복장의 색상까지 거의 실제 역사에 가깝게 재현되고 있다. 의궤라는 완벽한 참고서가 있는 덕분이다. 기록된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그 어떤 역사 재현 행사보다 화려하고 정교하게 축제를 구성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넜던 사실은 현대에 보기 드문 이색적인 이벤트로 재탄생됐으며, 한번 행차를 나가면 백성들의 민원 수십 건을 직접 처리했던 정조의 ‘격쟁’을 상황극으로 재현한 것 또한 독특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수원 화성행궁과 청계천 석벽에는 김홍도를 비롯한 당시 도화서 화원들이 완성한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가 그려져 있는데, 어지간한 벽화나 장식물보다 장소의 의미를 잘 담아낸 좋은 공공미술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또 다른 특징은 궁중음식 중 일상식의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사료라는 것이다. 잔치음식 뿐만 아니라 8일 동안 왕실 사람들이 먹고 마셨을 식단까지도 모두 기록해두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는 이 의궤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궁중떡, 두텁떡과 삼색주악을 고증해 민간에 기술을 이전하기도 했다.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를 위해 성대히 준비한 회갑연에 등장했던 떡인지라 왕의 효심이 담긴 음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식자재를 궁중의 섬세한 솜씨로 빚어낸 것이 경기지역 상류층 음식의 특징이다. 의궤의 기록을 잘 활용하면 수원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통닭거리 말고도 다양한 음식 콘텐츠들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 정조대왕 능행차의 또 다른 잠재력이다.

수원 화성행궁에 전시돼 있는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 ⓒ김지나
수원 화성행궁에 전시돼 있는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 ⓒ김지나

다른 지역 축제들이 참고할 만한 ‘의궤’ 역할 기대

지역 축제가 넘쳐나고 있음에도 우리는 어딜 가나 비슷비슷하게 상업적인 콘텐츠들을 맞닥뜨린다. 많은 지자체에서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것’, ‘SNS에서 유명한 것’을 쫓지만, 지역 고유의 이야기와 의미가 담긴 콘텐츠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라는 사실은 자주 간과된다. 그 와중에도 정조대왕 능행차는 비록 아쉬운 점들이 있을지 모르나 어떤 축제보다 지역의 역사, 시민의 참여, 그리고 문화관광적 가치까지 갖춘 이상적인 ‘축제의 본보기’라 할만 했다.

의궤를 만든 목적은 후대에 비슷한 행사를 개최해야 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많은 축제와 행사들이 재개되고 있는 요즘, 역사의 진정성 속에서 새로운 문화콘텐츠의 가치를 발굴해보는 시도가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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