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백》…원작의 정수는 살리고, K패치로 비틀고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05 11:05
  • 호수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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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게스트》를 리메이크한 영화 《자백》

충무로 리메이크의 단골 국가는 일본이다. 정서적으로 비슷한 문화권이니만큼 재가공이 유리하고, 원작의 인지도가 홍보에 일조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골든 슬럼버》 《리틀 포레스트》 《인랑》 등이 이러한 흐름에서 K패치를 부착했다. 새로운 아이템 찾기에 고민하는 충무로의 레이더망은 근 몇 년간 유럽과 남미 시장으로도 빠르게 뻗고 있는 상황. 국내에 덜 알려진 작품이 많다는 이점이 이들 영화에 대한 리메이크를 이끌고 있다는 평이다. 색다른 서사를 원하는 관객의 니즈(욕구)가 맞물린 지점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극장가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지난 추석 개봉한 라미란, 김무열 주연의 《정직한 후보2》는 2014년 브라질에서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정직한 후보》의 속편. 이성민, 남주혁 주연의 《리멤버》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가던 80대 치매 노인이 가해자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여정을 떠나는 캐나다·독일 합작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2015)의 리메이크 작이다. 그리고 유럽 DNA를 이식한 또 한 편의 영화 《자백》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자백》은 스페인 오리올 파울로 감독이 연출한 《인비저블 게스트》(2017)의 리메이크다.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작품이 국내에서 리메이크된 건 《더 바디》(국내에서 《사라진 밤》으로 각색)에 이어 두 번째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페인 영화는 어떻게 리메이크됐나

IT 기업 대표 민호(소지섭)는 호텔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의식을 잃는다. 의식을 찾은 민호는 호텔에 함께 있던 내연녀 김세희(나나)가 둔기에 맞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마침 들이닥친 경찰. 혐의는 민호를 향한다. 민호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사건 당일 호텔 방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고, 창밖으로 범인이 도주하는 게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후 재판을 기다리는 민호 앞에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변호사 양신애(김윤진)가 찾아온다. 양신애는 그의 주장에 허점이 많다며, 승리를 위해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자신이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처음 만난 변호사를 믿어도 될까? 민호는 망설인다.

《세 번째 손님》이란 제목으로 넷플릭스에서 제공 중인 원작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의 장점은 명확하다. 밀실 살인이라는 미스터리가 안기는 추리의 재미. 변호인과 의뢰인의 진실 공방이 팽팽하게 이어달리기를 하며 반전을 향해 나아가는 치밀한 구성이 작품에 대한 호평을 이끌어냈다. 이런 이야기의 힘을 알아챈 건 한국뿐이 아니다. 이탈리아와 인도 영화 관계자들의 눈에도 띄어 《인비저블 위트니스》 《바들라》라는 이름으로 해당 나라에서 각색된 바 있다.

흥미롭게도 이탈리아에서 리메이크한 《인비저블 위트니스》는 2019년 국내에 개봉한 바 있는데, 이 영화가 세운 리메이크 전략은 검증받은 원작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원작을 거의 ‘복붙’(복사+붙여넣기)한 인상이 강하다. 덕분에 원작의 장점은 그대로 이식했지만, ‘그럴 거면 왜 굳이 리메이크했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리메이크는 원작과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닌 셈이다. 어떤 부분을 빼고 어떤 부분을 더할 것인가. 여기에 더해 신경 써야 하는 건 국내 현실에 걸맞은 설정 업데이트다.

《자백》은 원작의 큰 뼈대를 그대로 수혈하면서 몇 가지 설정을 한국 시장에 맞게 수정했다. 먼저 주인공 남자가 재벌집 사위라는 설정을 더하고, 유부녀로 설정됐던 내연녀는 미혼으로 수정했다. 전자가 민호가 외도 중에도 아내와의 이혼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 한 욕망을 강화시킨다면, 후자는 인물 수를 줄여 사건을 조금 더 심플하게 가져가려 한 시도로 보인다. 밀실 사건을 재구성하며 의뢰인과 변호사가 두뇌 싸움을 벌이는 장소가 호텔에서 외딴 호숫가 별장으로 바뀐 것도 가산점을 받을 만한 요소다. 을씨년스러운 장소로 무대를 옮기면서 추리극 특유의 분위기가 더욱 살아났다.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반전이 밝혀지는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당기는 대신, 원작에 없던 결말이 추가됐다. 벌을 행한 자를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처단하는 방식인데, 인과응보에 예민한 다분히 한국적인 각색이다. 이로 인해 《자백》은 차가운 느낌으로 끝난 원작과 달리 뜨거운 기운을 관객에게 전하며 막을 내린다. 원작이 지닌 깔끔하고 담백한 결말을 선호했을 관객 사이에서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부분이다.

《자백》은 큰 틀에서 ‘후더닛(whodunit: 범인이 누구냐에 초점을 둔 스릴러)’의 덫을 놓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보다 ‘진실’을 두고 벌이는 두뇌 게임이 더 흥미롭게 피어오르는 영화다. 영화가 관객에게 긴장감을 안기는 방법 중 하나는 ‘정보값 차이’다. 가령 영화 속 인물이 모르는 일을 관객만 알게 하는 방법. 이때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이 처한 상황을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며 사건을 있는 그대로 즐기게 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자백》 한 장면ⓒ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진실을 두고 벌이는 ‘밀당’

반대가 영화 속 인물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관객이 모르는 경우다. 과연 저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내뱉는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가. 《자백》은 후자의 방법으로 관객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관객을 탐정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날의 사건’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여러 번 반복돼 전개된다. 동일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가 화자가 되느냐에 따라 인물들의 선택은 물론 인격도 달라진다. 일견 구로자와 아키라의 그 유명한 《라쇼몽》(1950)이 떠오르는 구성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다시 전개되면서 진실에 다가가는 구성 말이다.

《라쇼몽》식 구성의 영화들이 이젠 하나의 장르처럼 돌고 도는 상황에서 《자백》이 취하고 있는 색다름이라면, 양신애가 구성하는 ‘그날의 진실’에 대한 시나리오 목적이 민호의 무죄를 밝히려는 것의 발로인지 혹은 다른 의도인지에서 오는 또 한 번의 수수께끼다. 리메이크 영화로서 《자백》이 지닌 성취라면 이 부분이다. 반전을 알고 있는 관객도 몰입해서 볼 수 있도록 이야기를 숨기고 드러내는 솜씨가 좋다.

이런 유의 영화에서는 배우의 연기가 작품의 결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원작과 가장 큰 분위기 차이는 배우들의 연기 톤에서 기인한다. 영화는 소지섭이 지닌 기존의 곧은 이미지를 역이용한다면, 김윤진이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보여온 모습을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새로움과 익숙함을 충돌시킨다. 눈에 띄는 것은 내연녀 세희 역의 나나다. 이 영화에서 세연은 유민호나 양신애와 달리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못한다. 그저, 유민호의 시나리오 안에서 움직이거나 양신애의 가설 안에서 그려질 뿐이다. 그래서 이 연기는 쉽지 않다. 수동적인 상황에서 미세한 표정이나 말투 하나로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임무. 이 어려운 임무를 나나는 강단 있게 돌파해 낸다. 좋은 얼굴이고, 앞으로가 더 궁금해지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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