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스토리텔러가 K콘텐츠 시장 이끈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3.01.08 14:05
  • 호수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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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제작 명가 CJ ENM이 ‘콘텐츠 산실’ 자처한 이유
오펜(O’PEN) 사업으로 스토리텔러 육성해 콘텐츠 선순환
경찰서·국과수 등 현장 취재로 작품에 힘 더해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다. 이미 만개한 시장에서 조명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체 불가한 스토리다. 글로벌 플랫폼이 한국 시장을 겨냥한 콘텐츠를 속속 내놓으며 경쟁하는 지금, K콘텐츠가 자체 경쟁력을 갖기 위해 스토리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그래서 이미 인기가 담보된 웹툰과 웹소설을 활용한 콘텐츠가 제작되고, 바로 영상화가 가능한 극본을 찾는 공모전도 열린다. 이렇게 대부분 ‘스토리’에 집중할 때,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에 방점을 찍는 곳이 있다. CJ ENM이 2017년부터 운영하는 신인 창작자 육성 사업 ‘오펜(O’PEN)’이다. 기존 공모전처럼 단순히 작품을 뽑는 것이 아니라, 선발된 작가들을 스토리텔러로 키워 영향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tvN 드라마 《슈룹》, 디즈니플러스의 미스터리 수사극 《형사록》 등 걸출한 작품들이 오펜이라는 산실에서 탄생했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책인 《불편한 편의점》도 오펜 1기 김호연 작가의 작품이다. 오펜 출신 작가들이 장르와 영역을 막론하고 K콘텐츠 업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왜 작가 지망생들이 가장 합격하고 싶은 공모전으로 오펜 공모전을 꼽는 걸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1월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오펜 센터를 찾았다.

tvN 드라마 《슈룹》, 디즈니플러스의 미스터리 수사극 《형사록》 등 걸출한 작품들이 오펜 작가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tvN·디즈니플러스
tvN 드라마 《슈룹》, 디즈니플러스의 미스터리 수사극 《형사록》 등 걸출한 작품들이 오펜 작가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tvN·디즈니플러스

창작지원금·개인 집필실 등 환경 지원

캐릭터와 스토리가 콘텐츠의 성패를 가른다는 것을, 콘텐츠 제작 명가로 불리는 CJ ENM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신인 창작자 발굴·육성 프로젝트에 나선 배경이다. 예비 창작자들은 불안정한 환경에 놓여 있다. 공모전은 꿈의 관문이지만 꿈을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집필할 수 있는 환경을 꾸리는 것도 어려운 데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에 생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취재와 인터뷰도 쉽지 않다. 오펜은 작가들이 글을 쓸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부터 제공한다. 1000만원의 창작지원금과 개인 집필실이 대표적인 혜택이다.

오펜 센터에는 63개 집필실이 있다. 개인 집필실에는 책상과 작은 침대가 마련돼 있고, 24시간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각자의 이름이 붙은 집필실에서 작가들은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간단한 아침식사와 간식, 음료가 제공되고, 게시판에 이름을 적으면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식권이 발급된다. 읽고 싶은 책도 게시판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걱정 없이 집필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참여 기간 동안 온전히 작품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 “개인 집필실은 오펜의 가장 큰 혜택 중 하나다. 언제든 와서 (글을) 쓰고 갈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오펜 6기 김태완 작가와 김민영 작가의 말이다.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는 현재도 주말에 집필실을 찾아 글을 쓴다. 그는 “작가로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시기에 오펜의 도움으로 《고스트 캅》이라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판권을 판매했다”며 오펜을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게 해준 영화 학교’라고 표현했다.

오펜에는 63개의 개인 집필실이 있다. 작가들은 24시간 자유롭게 집필실을 이용할 수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오펜에는 63개의 개인 집필실이 있다. 한 작가의 개인 집필실 모습 ⓒ 시사저널 이종현
게시판을 통해 회의실 이용, 도서, 식사 신청 등을 할 수 있다. 간식과 음료가 비치된 라운지도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시사저널 이종현
게시판을 통해 회의실 예약, 도서 신청, 식사 신청 등을 할 수 있다. 간식과 음료가 비치된 라운지도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시사저널 이종현

“견학과 취재 통해 다양한 세계 살필 수 있어”

로맨스 장르가 콘텐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과거와 달리 범죄와 사극, SF 등 다양한 장르물이 등장했다. 일상적이지 않기에 현실을 구현하기 위한 많은 취재가 필요한 영역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교도소, 경찰청, 소방서, 병원 등은 작가들의 중요한 취재 공간이 된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나로우주센터는 SF 장르를 구상하거나 우주를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현장이다. 사회적 화두를 던지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성범죄자 위치추적중앙관제센터를 방문하기도 한다.

마약범죄수사대를 통해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현장 얘기를 듣고, 직접 사격을 해보면서 그 느낌을 극본에 담는다. 법적, 의학적 소견을 검토할 수 있는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도 진행된다. 코로나19로 잠시 멈췄던 현장 견학은 엔데믹 전환과 함께 재개되고 있다. 공통 취재가 아니더라도 취재가 필요한 작가가 요청하면 오펜 쪽에서 공문을 보내 도움을 준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슈룹》은 오펜 교육 기간 중에 탄생한 작품이다. 2019년 진행된 창덕궁 견학과 역사학자 초빙 교육이 박바라 작가가 쓴 《슈룹》의 발판이 됐다. 국과수 견학의 경험은 《슈룹》에 긴장감을 더하는 스릴러적 요소로 녹아 들었다. 《슈룹》을 집필한 박바라 작가는 “사극을 준비하면서 관련 정보를 책이나 인터넷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직접 궁에 와서 전문가 강의를 들으니 혼자 준비할 때와 보이는 것 자체가 달랐다”고 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모두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를 집필한 신하은 작가는 “개인적으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오펜은 그 경험의 스펙트럼을 넓혀줬다”며 “많은 견학 프로그램과 취재 기회를 통해 다양한 세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회의실에서는 명작을 만들어낸 작가와 감독의 특강이 진행된다. 선배들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다. 시나리오 작법과 시리즈 구성, 기획 등 강의 주제도 다양하다. 지난해에는 《우리들의 블루스》 《라이브》의 노희경 작가가 강연을 했고, 《빈센조》의 박재범 작가, 《나의 해방일지》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는 미니 시리즈 작법과 캐릭터 만들기를 주제로 특강을 열었다. CJ ENM의 제작사인 스튜디오드래곤과 OTT 서비스 티빙이 원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도 특강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이 외에도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법, 계약서 쓰기 등의 강의를 통해 작가들의 권익을 보장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교도소, 경찰청, 소방서, 병원 등은 작가들의 중요한 취재 공간이 된다. 현장 취재에 참여한 작가가 사격을 체험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교도소, 경찰청, 소방서, 병원 등은 작가들의 중요한 취재 공간이 된다. 경찰청 현장 취재에 참여한 작가가 사격을 체험하고 있다.
드라마 세트장을 직접 방문해 제작 과정을 살피기도 한다.
드라마 세트장을 직접 방문해 제작 환경을 살피는 모습. 사진은 tvN 《스타트업》 촬영 현장
오펜센터 내 회의실에서는 명작을 만들어낸 감독과 작가들의 특강이 열린다. ⓒ CJ ENM
오펜 센터 내 회의실에서는 명작을 만들어낸 감독과 작가들의 특강이 열린다. ⓒ CJ ENM

왜 작가 지망생들이 오펜을 선호할까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글의 영상화다. 오펜은 2017년부터 스토리텔러 당선작 중 10편을 영상화해 tvN에 편성하고 있다. 당선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단막극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신예 작가들의 작품이 빛을 볼 수 있게 하고, 드라마 제작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단막극은 작가들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무대로 여겨진다. 노희경 작가는 “단막극은 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르다. 작가로서는 한 시간 안에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을 시험받는 중요한 잣대”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오펜은 2022년부터 당선작을 선보이던 ‘드라마 스테이지’의 이름을 ‘오프닝’으로 바꾸고, 콘텐츠 니즈에 맞춰 시리즈물 2편을 포함한 10편의 작품을 방송하고 있다. 오펜에서 영상화된 작품들은 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저력을 입증했다. 2기 김민경 작가의 《파고》는 72회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고, 이아연 작가의 《물비늘》은 휴스턴 국제영화제, 4기 차이한 작가의 《대리인간》은 2021년 스톡홀름 필름&TV페스티벌, 김해녹 작가의 《덕구 이즈 백》은 아시아태평양스타어워즈에서 각각 수상했다.

공모전을 통해 당선될 경우 작품이 회사에 귀속되고 작가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작가 지망생들의 불안 요소다. 오펜 작가들의 창작물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귀속되고, CJ ENM은 그에 대한 법적인 보호를 해준다. 제작사와의 계약은 기성 작가들도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작품과 제작을 연결하는 것도 오펜의 몫이다. 제작사에서 작가를 의뢰하는 문의가 오면 그에 맞는 장점을 갖춘 작가를 매칭해 주면서 향후 작품 활동을 돕는다. 지분이나 수익성을 담보로 한 수수료 없이, 작가의 집필 기회를 연장해 주는 것이 목표다.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업계로 나아가는 과정까지 함께한다.

tvN의 《블랙독》 《갯마을 차차차》, 영화 《아이》도 오펜 출신 창작자들의 단독 집필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tvN·롯데엔터테인먼트
tvN의 《블랙독》 《갯마을 차차차》, 영화 《아이》도 오펜 출신 창작자들의 단독 집필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tvN·롯데엔터테인먼트

이렇게 6년 동안 발굴된 스토리텔러는 200명에 이른다. 만들어진 콘텐츠는 tvN뿐 아니라 지상파와 케이블, OTT, 영화 등 플랫폼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다. tvN의 《블랙독》 《갯마을 차차차》 《슈룹》, TV조선의 《복수해라》 《마녀는 살아있다》, KBS의 《경찰수업》, 영화 《아이》, 디즈니플러스 《형사록》 등이 오펜 출신 창작자들의 단독 집필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콘텐츠 소비 트렌드의 변화에 맞춰 모집 부문도 개편했다. 2020년에는 시트콤, 2021년에는 숏폼, 지난해에는 시리즈 부문을 신설했다.

영화감독들도 OTT에서 시리즈물을 제작하는 등 장르 간 경계가 모호해진 콘텐츠 업계의 트렌드에 맞게, 영화 시나리오를 시리즈물로 영상화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2019년부터는 뮤직 부문에서도 작곡가를 육성하고 있다. 음악 역시 드라마나 예능 OST 등으로 연계를 꾀할 수 있는 콘텐츠다. 이미 오펜 뮤직 출신 작곡가들은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 등 아티스트 음반뿐 아니라 《슬기로운 의사생활》 《술꾼도시여자들》 《사랑의 불시착》 《나의 해방일지》 등 유명 드라마 OST를 공동 작곡하거나 공동 편곡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콘텐츠 기업이 스토리텔러를 육성하고, 스토리텔러가 콘텐츠를 생산함으로써 다시 콘텐츠 기업의 이윤이 창출되는 순환의 생태계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CJ ENM이 ‘콘텐츠 명가’에서 ‘콘텐츠 산실’로도 영역을 확장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K콘텐츠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올해에도 열렸다. 단막·시리즈 부문은 1월 2일~16일까지, 장편 부문은 2월 1일~13일까지 스토리텔러를 모집한다. 올해의 모집 주제는 ‘캐릭터’다. CJ ENM 오펜팀 관계자는 “작년에 이어 다시 ‘캐릭터’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선정했다.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니만큼, 캐릭터를 잘 구현할 수 있는 스토리인지가 중요한 선정 기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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