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보유국-자력갱생’ 신년사에 드러난 김정은의 희망회로
  •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1.06 16:05
  • 호수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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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구도에 편승…‘중·러와 협력해 살길 도모하기’ 한계 드러내
‘현실과 이상’ 괴리에서 갈팡질팡

희망과 순리. 새해에 떠올리는 두 단어다.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희망(希望) [명사]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순리(順理) [명사] ‘순한 이치나 도리. 또는 도리나 이치에 순종함.’ 새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희망이 주변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 순리를 이룬다면 순풍에 돛 단 기분을 느끼기 마련이다. 반면 새해 희망과 순리가 잘 맞지 않는다면 이를 어찌 돌파해 나갈까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새해맞이는 몇 년째 고민에 빠져 있는 모양새다.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하던 모습은 벌써 4년 전 일이 돼버렸다. 2019년 신년사에서 그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2018년) 북남관계가 대전환을 맞은 것처럼 쌍방의 노력에 의하여 앞으로 좋은 결과가 꼭 만들어질 것”으로 믿는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어서 그해 2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장장 66시간 열차로 이동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도 임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른바 ‘하노이 노딜’이었다.

이후 김 위원장의 신년사는 사라졌다. 연말 당 중앙위 전원회의 결과 보도가 신년사를 대신했다. 2019년부터 12월 마지막 주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2021년 1월에는 8차 당대회가 있어 아예 신년사를 건너뛰고 당대회 결과 보도가 신년사를 갈음했다. 2021년과 2022년 12월에도 마지막 주에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고 그 결과에 대한 보도가 김정은의 신년사를 대신했다. 어느새 남측 언론이나 학계에서도 북한 신년사라는 말 대신 북한 신년 메시지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북한은 1월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결과를 보도하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의 탄두부를 둘러보는 모습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구체적 경제 목표 못 밝힌 김정은의 고민

신년사를 직접 육성으로 발표해야만 자신감의 표현이냐고 반문할 수는 있다.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패턴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다. 다만 하노이 노딜이 있었던 2019년 이후 새로운 패턴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의 고민이 엿보인다.

김 위원장은 2018년 그동안 고수하던 경제·핵 병진노선을 사회주의경제건설총력집중노선으로 변경하고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그해 6월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었다. 2017년도에 6차까지 감행한 핵실험과 그해 11월29일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이후 국방력을 어느 정도 구축했다고 판단해 경제력 건설을 위한 우호적 대외 환경 조성에 박차를 가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그 꿈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과 함께 깨지고 말았다. 국제 규범에 맞는 사찰과 검증이라는 비핵화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제재 완화와 경제력 건설이라는 희망을 이루려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올해 1월1일 보도된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결과는 여전히 희망과 순리의 괴리를 보여주고 있다. “2022년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시간이었고 분명코 우리는 전진”했다고 자평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밝히지는 못했다. 어느 나라든 경제 성과나 목표는 구체적인 수치로 발표하는 게 보통인데 살림집 건설을 제외하고는 숫자로 표현된 경제 분야 성과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12개 중요고지’를 기본목표로 설정했다고 밝혔지만 그게 뭔지는 미공개했고, 기간공업은 언급조차 없었다. 미공개한 12개 중요고지에 구체적인 수치가 담겨 있겠지만 외부에 공표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짐작이 간다.

외부에 밝히지 못한 경제 분야 성과와 목표는 자력갱생이라는 오래된 구호로 채워져 있다. 패배주의나 기술신비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자립의 방도임을 재차 밝히며 김정은 시대 자력갱생의 특징인 기술의 국산화를 강조했다. 과거 선대의 자력갱생 특징인 막대한 동원과 노동력 투입을 통한 생산력 증대 외에 기술 개발을 통한 효율화를 추구해온 김정은 시대 자력갱생 구현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대단히 강조하는 것은 현재 원하는 만큼 뜻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방증한다. 개방과 혁신이라는 순리를 따르지 않은 채 경제력 건설을 하겠다는 희망이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지 지켜볼 일이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월1일 조선소년단 제9차 대회 대표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월2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강대강’ 정면승부 기조 유지

대외정책에서도 강대강, 정면승부 기조를 유지하며 폐쇄적인 대결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신냉전’ 구도를 기정사실화하며 대미, 대적 투쟁을 강조하는 가운데 국제질서를 ‘다극화’ 상황으로 규정했다. 다극화의 기본축을 이루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뜻이다.

걸음 더 나아간다면 북한이 핵보유국가로서 다극의 한 축을 이루어 나가겠다는 그들만의 희망도 암시하고 있다. 의례적으로라도 ‘신냉전’ 구도를 해소하고 인류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상식이자 순리일 텐데, ‘신냉전’ 구도에 편승해 살길을 도모하겠다는 희망은 지금 북의 다급한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입장에서는 순리를 따르자면 자기의 정체성과 행동양식을 모두 바꾸어야 하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새해 금연·금주와 다이어트를 결심하지만 자기 생활습관과 행동방식을 거의 모두 바꾸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북한도 철저한 변화가 없으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인다. 더군다나 대외정책에서 밝히고 있는 신냉전 편승 희망이 마치 새해에는 운동을 열심히 해서 밤새 술을 마실 수 있는 체력을 기르자는 것과 같이 잘못된 방향과 악순환을 지향하고 있어 우려스럽다.

이웃이나 동료가 순리를 버리고 잘못된 희망을 품고 있으면 충고도 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 정부는 1970년대 이래로 선평화·후통일 원칙에 따라 북한을 대했다. 정권에 따라 다소의 부침은 있었지만, 때로는 고언도 아끼지 않고 다투기도 하면서 그래도 궁극적 목표인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위해 북한에 조언도 하고 지원도 마다하지 않으며 노력해 왔던 게 사실이다. 지금은 비록 다투는 국면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 ‘담대한 구상’도 그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다. 우리 진심에 북한이 제대로 반응해 새로운 희망을 보기를 바란다면 새해 너무 큰 소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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