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유령》과 《교섭》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1.28 11:05
  • 호수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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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대작 《유령》과 《교섭》의 흥미로운 지점들

한국 영화 대작 《유령》과 《교섭》은 극 중 시대와 장르가 확연히 다르지만, 국가를 둘러싼 신념에 관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두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동력이다. 범람하는 정보들 속에서의 혼선은 크고, 적은 명확하지 않으며, 공동선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 시대를 통과하는 영화적 태도들로 보여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각기 다른 장르적 노선을 취한 두 영화가 지닌 장단점을 살펴본다.

영화 《유령》 포스터 ⓒCJ ENM 제공

스타일로 무장한 《유령》

《유령》은 1933년 일제강점기의 경성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조선 항일조직 흑색단의 비밀 스파이 조직 ‘유령’이 활약할 때다. 조선총독부 내부까지 잠입할 정도로 이들의 활동은 은밀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임 총독을 암살하려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총독은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에게 유령 소탕 지시를 내린다.

영화는 크게 세 번의 흐름으로 나뉜다. 비록 총독 암살에는 실패하지만 그간 유령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 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초반 스케치가 등장한다. 이후 카이토의 용의선상에 오른 다섯 명이 바닷가 절벽 위 외딴 호텔에 모이는 것이 두 번째 대목.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인 쥰지(설경구), 암호문 기록 담당자 차경(이하늬), 조선인이지만 정무총감의 비서로 일하는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전문가 천계장(서현우), 통신과 말단 직원 백호(김동희)가 그들이다. 고풍스러운 호텔은 일본인에게는 휴양의 공간이지만, 조선인에게는 지하 고문실을 갖춘 또 다른 감옥이다. 24시간 내 그들은 유령임을 고백하거나, 유령이 누구인지를 지목해야 한다.

원작 소설인 마이자(찝소)의 《풍성(風聲)》은 중국의 외딴 성에서 항일운동 스파이를 색출하는 추리물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가는 밀실 스릴러의 구조와 유사하다. 《유령》 역시 인물들이 호텔에 모인 대목에서 이 같은 원작의 재미를 추구하려 한다. 이 지점만으로도 영화가 추구하고자 한 개성은 분명하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항일운동의 양상과 시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만 목표를 두지는 않는 것이다. 그보다 《유령》은 스파이 영화 장르가 가지는 특질들을 활용하고자 한다. 존재를 숨기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냉전시대의 스파이와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항일조직의 양상이 닮아있다는 데 착안한 설정으로 보인다.

인물들 사이의 심리 게임과 유령을 잡아들이려는 카이토의 폭주가 이어지다가, 《유령》은 또 한 번의 변주를 선보인다. 일부 인물이 호텔을 탈출한 이후부터 화려한 스타일이 돋보이는 액션 활극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급작스러운 전개라기보다 이해영 감독 전작의 뿌리들과 닿아있는 개성으로 읽힌다. 시대 혹은 소재만 감지하고서는 쉽게 기대할 수 없었던 장르 영화의 장치들을 엮어낸다는 점에서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과 스타일리시한 캐릭터 드라마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또 한 편의 전작 《독전》(2018)과 나란하다.

분명 새로운 시도가 많다. 차경과 쥰지가 서로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는 액션은 성별 구도를 뛰어넘는다. 그 시대에 허락되지 않았던 극강의 낭만성을 포착하는 장면들의 연출은 다분히 영화적인 애수를 보여준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총격 액션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활용돼 왔던 첩보물의 고리타분함을 비웃는 시원한 저격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모든 것을 어우러지게 엮는 힘이다. 크게 세 개의 구획이 지어지는 동안 각각의 스타일은 점차 융합되기보다 산발적 매력 어필에 그치고 만다. 특히 밀실 스릴러로서의 재미와 긴장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은 시대적 배경을 둘러싼 애초의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 여지마저 있다. 호텔 시퀀스에서 인물 관계를 설명하고 감정을 설계하기에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이후 본격적 액션은 스타일의 과잉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 관객에게는 본질적 질문이 남을 것이다. 이 영화에 세 번의 변주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 삼아 말하려던 핵심은 무엇인가?

영화 《교섭》 포스터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차분한 돌파의 맛 《교섭》

《유령》이 화려한 변주라면 《교섭》은 차분한 돌파를 택한다. 2007년 선교활동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23명의 한국인이 아프간 무장단체 탈레반에 피랍됐던 실화가 모티브다. 극단적 위치에 있는 두 종교적 신념이 부딪친 사건이지만, 영화는 위험에 처한 주체들을 중심에 놓기보다 그들을 구하려는 이들의 이야기로 키를 돌렸다. 주인공이 외교부 직원 재호(황정민),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으로 설정된 이유다. 둘은 허구의 인물이다. 실제 교섭 내용, 참여 인원은 극비 사항이기에 영화적 허구와 상상력을 보탠 것이다.

유능한 협상가인 재호와 상황 해결을 위해 행동부터 하는 대식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외교와 안보라는 소속 부서의 입장 차이도 있다. 각자의 원칙 안에서 움직이며 부딪치던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 아래 하나가 된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다른 모든 것을 앞서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인질들을 무사히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 영화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사건의 결말은 이미 나와 있다. 《교섭》은 두 사람이 탈레반을 설득할 협상의 방안을 찾아내고, 실패하고, 다른 방안을 찾아서 시도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프가니스탄 원로 부족 회의인 ‘지르가’, 외국인 브로커의 등장 등 새로운 국면들은 필요한 순간마다 극의 긴장을 붙든다.

극의 하이라이트이자 최후의 보루인 대면 교섭으로 가기까지 수많은 딜레마를 거치면서도 영화의 명제는 흔들림이 없다. 그 어떤 위험도 국민의 생명보다 귀하지 않다는 것, 잘못을 저지른 이들 역시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국민이라는 것. 종교적·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인본주의적 시각으로 돌파한 것이 《교섭》의 방식이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장면들을 재현하기 위해 선택한 요르단 해외 로케이션, 각각 말의 설득과 액션을 책임지는 황정민과 현빈의 활약도 안정적이다.

이 탁월한 안정성은 《교섭》의 장점이자 아쉬움이다. 탈레반의 인질이 된 이들에게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두 공무원의 활약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영화적 선택은 최선이지만, 종교와 믿음을 둘러싼 본질적 질문 대신 균형적 시각을 유지하는 안전한 방식으로만 느껴지기도 한다. 예측 가능한 서사 안에서 연출가의 개성이 크게 발휘될 여지 역시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테러 집단의 협박과 잔혹한 행태, 누군가의 죽음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세계에서 카메라의 윤리적 시선을 최대한 견지한다는 점에서는 임순례 감독의 부드러운 듯 단호한 입장이 엿보이는 듯하다.

영화에 숨통을 틔우는 사람들

두 영화는 진중하고 긴박한 분위기에서 유머러스함을 발휘하는 캐릭터들로 숨통을 틔운다는 점마저 닮았다. 《유령》에서는 고양이 ‘하나짱’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펼치는 천계장 역의 서현우가 그 몫을 담당한다. 《교섭》에서는 강기영이 연기하는 카심이 눈에 띈다. 원래는 한국인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발휘하며 현지인처럼 살아간다. 아프간 파슈토어를 할 줄 아는 그는 교섭 과정의 필수 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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