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도, 학생도 아닌 존재들을 아십니까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05 14:05
  • 호수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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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다음 소희》에 보내는 지지

‘사랑의 콜센타(터)’는 TV 예능에 있을 뿐이다. 진짜 콜센터를 잠식하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라, 감정노동이다. 수화기 너머 폭언과 욕설은 기본. 성희롱까지 당하면 상담사의 멘털이 털리기 일쑤다. 소희(김시은)는 그곳에서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받기로 한 인센티브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지급되지 않자 결국 터지고 만다.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 소희가 특성화고등학교 실습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생인가 노동자인가. 확실한 건 비정규직으로도 범주화되지 않는 실습생은 노동 현장에서 ‘최약체 중 최약체’라는 사실이다.

통신사 협력업체 콜센터에서 소희가 담당해온 일은, 다른 통신사로 갈아타겠다는 고객을 설득해 이탈을 막는 ‘해지 방어’였다. ‘욕받이’ 부서로 불릴 만큼 인격 모독이 극심한 곳에서 소희는 온갖 진상 고객들과 사투를 벌여왔다. 할당받은 목표 ‘콜수’(응대 횟수)를 채우기 위해 야근하고, 실적 압박을 견디고, 회사가 미끼로 던진 성과급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기계 부속품쯤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세계에서 소희는 조금씩 죽어간다. 그리고 진짜 질식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 《다음 소희》 포스터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왜 지키지 못하고, 애도하지 못하는가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에서 실제로 발생한 콜센터 현장실습 여고생의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정주리 감독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이 사건을 접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며 아마, ‘이전 소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제주도 생수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끼여 숨진 이민호군, CJ 제일제당 진천공장에서 상사의 폭언과 폭력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동준군,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주 70시간 가까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쓰러진 김민재군 등을 말이다. 이들은 모두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일터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회는 왜 이들의 사고를 막지 못했을까? 아니, 막지 않은 건 아닐까.

이것을 알리기 위해 《다음 소희》의 전반부는 소희 이야기로, 후반부는 소희가 겪은 경험을 제3자의 인물이 탐색해 나가는 전략을 쓴다. 소희의 자살을 기점으로 카메라를 소희 사건에 배정된 형사 유진(배두나)에게로 옮기는 방식이다. 이 영화의 진짜 지옥이 시작되는 건, 바로 여기. 《다음 소희》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여기부터다. 세상에 남겨진 어른들과 사회는 소희를 어떻게 애도하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애도하지 않는가가 그려진다.

소희에게 일어난 일을 쫓는 유진을 기다리는 건 어른들의 책임 전가와 변명뿐이다. 업체는 학교에, 학교는 교육청에, 교육청은 노동부에, 노동부는 다시 업체에 책임을 미루는 무한 루프의 떠넘기기. 사건을 파면 팔수록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돼온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드러난다. 이 시스템의 꼭대기에 꽈리를 틀고 앉아있는 건, ‘숫자’라는 맹목적인 실적주의다.

교육부는 취업률이라는 ‘숫자’를 기준으로 학교 예산을 편성하고, 본사는 지점별 실적이라는 ‘숫자’를 기준으로 하청을 관리하고, 현장은 인센티브라는 ‘숫자’를 미끼로 실습생들을 착취하다 보니 모두가 경쟁에 내몰린다. 학교는 학교끼리, 교육청은 교육청끼리, 하청은 하청대로 모두 ‘쟤보다, 더! 쟤보다 더’를 외치는 상황.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나. 아니 손은 댈 수 있을까. 그러기엔 너무 견고하게 굳어진 시스템 안에서 가해자이자 방관자들도 이미 만성화됐다. 업체도, 선생님도, 교감도 입을 맞춘 듯이 말한다. “우리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 장학사가 유진을 향해 내뱉는 말이 무엇보다 뼈아프다. “적당히 하십시다! 다음에 어디로 가시렵니까. 교육부요?”

고졸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현장실습 제도가 취업의 질을 떨어뜨리는 ‘제로섬 게임’임을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침묵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 숫자가 있기 때문이다. 취업률이, 방어율이, 가입률이 있기 때문이다. 숫자 앞에서 힘을 잃는 것? 한국의 산업재해 현실을 기록한 르포집 《노동자, 쓰러지다》에는 “인간이 일하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노동안전보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답한 건 뜻밖에 ‘감수성’이었다. 타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유진이 찾아간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건, 바로 이 감수성이었다. 우리 사회가 놓친 감수성이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우리가 모르거나 잊고 있는 존재들을 위해

정주리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다음 소희》는 감독의 전작 《도희야》와 선을 이어 언급될 만한 여지가 많다. 개인 사정으로 좌천된 ‘경찰(《도희야》의 영남)/형사(《다음 소희》의 유진)’로 분한 배두나가 소녀와 연결되는 이야기란 점 때문만은 아니다. 잘못을 방관하고 침묵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두 작품 모두에 알알이 박혀 있어서다. 《도희야》의 시골 마을이 방관자들의 침묵이 일상화된 공간이었다면, 《다음 소희》는 사회 자체가 그런 섬처럼 그려진다. 즉, 《도희야》가 개인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인물의 이름 앞에 ‘다음’을 붙인 《다음 소희》는 개인이 아닌 사회 시스템을 조준해 달린다.

유진 역을 두고 “처음부터 배두나여야 했다”고 한 정주리 감독의 말은 단순 립서비스는 아닐 것이다. 《다음 소희》가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은 직접적이다. 유진의 대사를 통해 여러 번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을 토해 낸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사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영화 완성도 면에서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런 단점에도 감독이 해야 할 말을 인물을 빌려 해야겠다면? 이를 믿고 맡기기에 배두나만큼 믿음직한 배우는 많지 않다. 배두나는 전형적인 캐릭터도 그만의 숨결과 매력으로 고루하지 않게 감싸 안아버리는 보기 드문 저력의 소유자다. 실로, 이 영화에서 평면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유진 캐릭터는 배두나의 존재감에 상당히 빚지고 있다.

소희를 연기한 신예 김시은의 매력도 상당하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다른 기운의 얼굴을 보여주는 터라, 연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여러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가 개봉되면 이 배우의 매력이 일반 관객들에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을까 싶은데, 한국 콘텐츠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배우로 성장하리란 예감이 든다.

《다음 소희》에는 ‘또 다른 소희’들도 등장한다. 소희처럼 현장실습으로 노동 현장에 나간 친구들이다. 우린 이들에게 얼마나 무감했었나. 매해 돌아오는 수능. 세상은, 언론은, 우리는 으레 ‘고3은 모두 예비 수험생인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대학이 아닌 길을 선택해 노동 현장을 누비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은 채. 《다음 소희》는 우리가 모르거나 잊고 있는 얼굴들을 복원하려는 영화다. 그 길에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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