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의 새해 결심
  • 최영미 시인/ 이미출판사 대표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0 17:05
  • 호수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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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될 무렵에 외국 방송을 시청하다 나이와 직업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새해에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았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가 “새해에는 도넛을 덜 먹겠다”고 말했다. 새해에는 직장을 옮기겠다, 집을 사겠다, 그동안 못 했던 해외여행을 떠나겠다 따위의 거창한 희망을 언급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공감을 못했는데, 미소를 띠고 있으나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그냥 도넛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의 도넛을 콕 집어) 덜 먹겠다는 그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참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구나. 그처럼 구체적인 결심은 지키기 쉽지 않을까, 내게 묻는다면 새해 결심을 뭐라고 말할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 ‘라면과 달달한 케이크를 덜 먹겠다’. 케이크가 먼저가 아니라 ‘라면’이 먼저였다.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 겨울엔 라면을 달고 산다. 일 년이 다 가도록 하루 한 끼도 라면을 먹지 않은 해도 있었는데, 코로나19 이후 라면 소비가 늘어났다. 추운 밖에 나가기 싫어 집에서 음식을 해먹게 되었고, 나처럼 복잡한 요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겐 라면만큼 편리한 먹거리가 없다. 라면만 끓이는 게 아니라 달걀과 양파, 호박과 두부를 숭숭 썰어 냄비에 넣고 수프는 절반만 넣는다. 나름 건강을 챙기며 살아왔기에 여태 큰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정말 라면과 케이크를 끊을 수 있을까? No!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결심이 아니라 좀 더 지키기 쉬운 결심으로 바꿔야겠다. 밤늦게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을 열지 않기’는 어떨까. 희미한 조명 아래서 스마트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시력을 버린다.

새해에는 내가 노트북을 새로 살까? 십 년도 더 된 노트북을, 화면도 12인치가 될까 말까 한 싸구려 고물을 수리해 아직도 쓰고 있는 나. 완전히 망가져 동작이 멈추기 전까지는 기계를 바꾸지 않는다는 신념이 강해, 새로운 기계를 내 집에 들여놓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내가 아무리 느려 터져도 컴퓨터가 고장 나 이메일을 보내지 못 하는 사태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노트북을 새로 사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컴퓨터 매장을 둘러보긴 했다. 산문집 《난 그 여자 불편해》 출간을 준비 중인데, 내가 대표인 이미출판사에서 내는 책이라 편집과 제작은 물론 홍보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 노트북이 망가져 서점에 신간 등록을 하지 못하거나 보도자료를 보내지 못하는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당장 노트북을 바꿔야 한다.

최첨단 IT기술과 자본주의에 포위된 사람들. 자꾸 새것을 만들어 팔아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기업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라는 괴물과 싸우려는 몸짓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구즈(goods)’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로선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심지어 서점에서 책을 살 때도 뭘 더 끼워줘야 관심을 보인다니.

신간을 홍보하려 ‘이미’의 로고가 찍힌 헝겁 가방을 굿즈로 만들까? 고민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며칠 뒤에 새 책이 출간되는데 본문과 표지에 하자 없이 제대로 책이 나오기를, 서점에 신간 등록하고 보도자료 보낼 때까지 노트북이 고장 나지 않기를 바란다.

새벽에 일찍 깨어 침침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열고 출판 홍보 일정들을 조정하려 달력을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는 나는 또 무엇인가. 기계문명을 비판하는 나 또한 기계문명의 노예 아닌가. 안 하고 안 보기는 어렵다. 그냥 물 흐르듯 되는 대로 순리대로 살자. 마음 편하게.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b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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