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머니’ 위력에 눌린 스타 골퍼들, 美에서 사우디로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2 11:05
  • 호수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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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창설한 LIV 골프, 미국 주도 골프 질서 뒤흔들어
올해는 아시안투어(男)와 LET(女) 후원 통해 ‘사우디 골프’ 물량 공세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골프계의 질서가 ‘오일머니’를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의 거침없는 물량 공세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우선 남자골프의 경우, 지난해 6월 창설한 LIV 골프(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가 후원하는 신생 투어)가 기존 세계 무대를 양분하고 있던 PGA(미국프로골프)투어와 DP월드(유럽남자골프)투어(옛 유러피언투어)를 뒤흔들었다. PGA투어 톱랭커들인 필 미컬슨, 더스틴 존슨, 브룩스 켑카, 브라이슨 디샘보(이상 미국),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LIV 소속으로 옮겼다.

그런데 최근 톱랭커 수급이 주춤해지자 사우디는 프로골프대회의 새로운 틈새 전략을 꾀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이 레이디스 유러피언 프로골프투어(LET)와 아시안투어다. 올 시즌 LIV 골프 개막전은 2월24일 시작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사우디가 후원한 아시안투어를 먼저 열었고, LET는 2월16일 개최한다. 이들 대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LIV 골프 냄새가 물씬 풍긴다. 

2월5일(한국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끝난 아시안투어 개막전 ‘PIF 사우디 인터내셔널 파워드 바이 소프트뱅크 인베스트먼트 어드바이저’ 대회는 그 명칭만 봐도 사우디에서 후원한 것이 금방 드러난다. 이 대회는 2019년 유러피언투어인 DP월드투어 대회로 시작했지만, LIV 골프 창설 과정에서 잡음을 일으키면서 지난해 아시안투어로 갈아탔다. 그러자 LIV 골프로 이적한 브룩스 켑카 등 기존 선수들과 세계랭킹 4위 캐머런 스미스(호주) 등 정상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해 화려한 개막전을 연출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사실 아시안투어는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오일머니를 만나면서 숨통이 틔었다. 대회 수는 물론 상금도 몰라보게 증가했다. 예전 아시안투어 대회의 상금은 기껏해야 50만 달러 안팎이었다. 그러나 사우디가 대회명에 인터내셔널을 붙이면서 상금이 껑충 뛰었다. 지난해 열린 아시안투어 대회는 20개. 첫 대회 PIF 사우디 인터내셔널은 상금 규모만 500만 달러였다. 이 밖에도 150만~200만 달러짜리 인터내셔널 시리즈를 6개나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개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예정돼 있다. KPGA(한국프로골프)투어의 메이저 대회보다 상금 규모가 4배 이상 크다. 여자골프에 비해 국내 투어의 대회 수나 상금 규모가 열악해 ‘방향 키’를 잃었던 한국 남자선수들에게 사우디가 투자하고 나선 아시안투어는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시사저널 양선영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아람코 시리즈’ 골프대회에 출전하는 LPGA 톱랭커 전인지, 김효주, 리디아 고, 렉시 톰슨(왼쪽부터) ⓒ시사저널 양선영

전인지·김효주·리디아 고·렉시 톰슨 등 女 톱랭커, 사우디行

사우디는 아시안투어에 이어 LET에도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LET 개막전을 사우디 왕실의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Aramco)가 후원하면서 상금을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 메이저급에 준하는 대회로 만들어 놓았다. 2월16일 사우디아라비아 킹압둘라이코노믹시티에서 개막하는 ‘아람코 사우디 레이디스 인터내셔널 프리젠티드 바이 퍼블릭 인베스트먼트 펀드’ 대회는 총상금 500만 달러, 우승상금 75만 달러다. 이 상금은 LPGA투어 5대 메이저대회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규모다. 지난해 100만 달러에서 규모를 5배나 키웠다. 아람코는 올해만 LET 6개 대회를 후원한다. 사우디에서 시작되는 첫 대회를 필두로 태국, 영국, 필리핀, 미국 등을 순회한 뒤 사우디에서 마감하는 ‘아람코 시리즈’를 개최한다. 앞으로는 한국과 호주로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위기를 느낀 미국과 유럽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사우디의 여성 인권 유린 의혹을 씻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출전 선수들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세계랭킹 7위인 렉시 톰슨(미국)은 “골프에서 남자와 동등한 상금은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원했던 것이다. 상금이 크게 증가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번 대회는 여성 골퍼들에게 큰 힘이 된다. 우리 모두 미래의 여성 골퍼들을 위해 골프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특히 이번 대회가 심상치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총 120명이 출전하는데, 여기에 LPGA투어 메이저대회 챔피언 출신이 무려 13명이나 출사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우승자들이 출전하는 LPGA투어 개막전 ‘힐튼 그랜드 베케이션스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 불참했던 선수가 대거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톱랭커들이 미국을 외면하고 사우디로 향한 셈이다. 

필 미켈슨이 2022년 7월29일 LIV 골프 인비테이셔널 베드민스터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AP 연합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뉴질랜드)를 비롯해 4위 아타야 티띠꾼(태국), 7위 렉시 톰슨, 8위 전인지(29), 9위 김효주(28), 10위 하타오카 나사(일본) 등이다. 한국 선수들도 전인지, 김효주 외에 이정은6(27) 등 16명이 출전을 신청했고, 대기 선수도 4명이나 된다. 이처럼 앞다퉈 정상급 선수들이 출전하는 데는 무엇보다 상금이 매력적이다. 또한 이 시기에 LPGA투어가 열리지 않는다. 국내 선수들은 해외 전지훈련을 하다가 현지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는 데다 4월에나 열리는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 앞서 올 시즌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는 잣대로 활용할 수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 진출을 노리는 선수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기회다. 

 

앙숙 된 PGA와 LIV, 갈등의 골 더 깊어져

PGA투어와 DP월드투어가 양분하던 세계 프로골프계에 도전장을 내민 사우디아라비아의 LIV 골프가 올해 대회 수를 늘려 상금과 중계방송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중계방송은 미국의 ‘The CW’와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8개 대회를 개최했던 LIV 골프는 올해 14개로 늘렸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미국, 호주, 싱가포르, 스페인, 영국, 사우디 등 7개국에서 대회를 연다. PGA투어 메이저대회와는 겹치지 않게 스케줄을 짰다. PGA투어는 출전을 금지하고 있지만, 마스터스 등 일부 대회는 조건이 맞으면 LIV 골프로 이적한 선수들도 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LIV 골프는 대회당 총상금이 2500만 달러 규모다. 대미를 장식할 ‘팀 챔피언십’은 속칭 ‘쩐(錢)의 그린 전쟁’답게 총상금이 5000만 달러나 된다. 지난해 전체 총상금은 2억2500만 달러였지만 올해는 대회 수가 늘어나면서 3억7500만 달러가 될 전망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LIV 골프로 이적한 선수들이나 앞으로 진출할 선수들에게는 최고의 마켓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LIV 골프는 두 가지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세계랭킹 포인트를 따는 것과 PGA투어 선수들과의 갈등의 골이다. 

LIV 골프가 제도권에 들어오지 못하면 랭킹 포인트를 획득할 수 없다. 세계골프랭킹위원회(OWGR)는 PGA투어를 비롯해 23개 전 세계 투어에 차등적으로 세계랭킹 포인트를 산정하는데, LIV 골프는 들지 못했다. 올해 역시 LIV 골프에 랭킹 포인트를 부여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여기에 더해 가장 심각한 것은 선수들 간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다. PGA투어에 ‘남은 자’와 ‘떠난 자’가 앙숙이 되어 간다는 얘기다. 잔류파와 이적파 간 자존심 싸움이 PGA와 LIV 진영대결로 변질되고 있어 세계 프로골프계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숙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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