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수가 그래미 트로피 들어올리는 날
  • 김영대 음악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0 16:05
  • 호수 173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래미의 변화, 그리고 변하지 않은 것
그래미 수상이 K팝 세계화의 선행조건은 아니다

미국 팝음악 최대의 음악상 ‘그래미 어워드’는 지난 25회 시상식을 통해 몇 가지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최근 개그맨 황제성의 패러디로 국내에서도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샘 스미스의 히트곡 《Unholy》는 최우수 그룹·듀오 퍼포먼스상을 수상했다. 샘 스미스 개인의 수상을 넘어 듀엣 파트너인 킴 페트라스에게 최초의 트랜스젠더 수상이라는 영예를 선사했다. 그런가 하면 비욘세는 이날 4개의 상을 추가하며 클래식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경이 갖고 있던 종전의 기록을 경신, 그래미 역사상 가장 많은 트로피를 보유하게 됐다. 비록 수상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푸에르토리코 출신 뮤지션인 배드 버니는 그래미 사상 최초로 스페인어 앨범을 통해 올해의 앨범 후보에까지 오르는 유의미한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내세우며 음악 그 이상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리조는 아델, 비욘세 등 최고의 후보들을 제치고 주요 부문 중 하나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했다. LGBTQ+ 커뮤니티의 영웅인 가수 브랜디 칼라일의 특별공연은 특별히 그의 동성 부인과 입양한 아이들이 소개를 맡아 신선한 감동을 선사했다. 여러 면에서 분명 변화라면 변화라 말할 수 있던 올해의 그래미였다. 하지만 많은 이가 기다리던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방탄소년단은 이날 세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수상자로 호명되지 못했다. 이미 몇몇 곳에서 이를 ‘실패’로 간주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방탄소년단의 그래미 후보 지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분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나오기 힘든 희귀한 업적이다. 최우수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엔 2021년부터 3년 연속 후보에 올랐는데, 영미권의 아티스트를 포함해도 돋보이는 행보다. 최우수 뮤직비디오 부문에는 《Yet to Come》이 후보에 올랐다.

영화를 방불케하는 퀄리티의 뮤직비디오를 내놓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상이 돌아간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나 미국 시장에서 영어가 아닌 한국어 곡으로 겨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의미를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미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앨범에는 비록 앨범 아티스트로서는 아니지만 콜드 플레이의 앨범 ‘Music of the Spheres’의 참여 아티스트 및 작곡가 자격으로 후보에 올랐다. 그 유명한 비욘세조차 수상에 실패했던 부문이니만큼 애초에 큰 기대감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딱히 ‘실패’라거나 ‘실망’이라고 볼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2022년 4월3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제64회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에서 히트곡 《버터》를 열창하고 있다. ⓒAFP 연합

그래미를 수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지난 몇 년간 방탄소년단이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면서 그래미 수상 여부는 어느덧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그래서 “과연 우리는 언제쯤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K팝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역시 이제 낯설지 않다.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그래미에서 상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래미 어워드의 주체는 레코딩 아카데미라는 단체다. 레코딩 아카데미는 뮤지션 및 음악산업 관계자들로 이뤄진 단체로, 상대적으로 회원들의 연령대가 높고 미국 주류 사회의 인종적 구성이나 취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산업 종사자들이라고 하지만 객관성을 담보한 평단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종종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 비요크, 케이티 페리, 스눕 독, 다이애나 로스 등은 수십 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한 개의 트로피도 가져가지 못했으니, 그래미 수상 여부가 그 아티스트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라 하겠다. 굳이 덧붙이자면, 상을 받은 이유는 유추해볼 수 있어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훌륭한 음악적 결과물을 내놓으면 수상이 가능하지 않냐는 지적도 있다. 쉽게 말해 그들에게 ‘음악성’을 인정받으면 된다는 논리다. 물론 원론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모순이 있다. 방탄소년단이 지난 3년간 그래미의 선택을 받아 후보에 오른 것은 그들의 음악이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미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수많은 아티스트가 정말 ‘음악성’이 부족해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인가?

과거 수상자들의 면면을 볼때 그래미가 늘 ‘음악성’과 ‘예술성’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흥미롭게도 그래미는 거의 매번 가장 ‘유명한’ 음악 혹은 아티스트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왔고, 그 안에서 ‘음악성’이라는 일관된 기준을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다. 방탄소년단이 수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레코딩 아카데미의 권위를 굳이 낮춰 봐선 안 되겠지만, 요는 그들의 선택이 늘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시장 점령한 K팝, 여전히 비주류?

사실 음악의 완성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세와 흐름이다. 올해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스의 수상, 그리고 리조의 수상에 단순히 음악적인 함의만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음악의 완성도는 물론이지만 음악 외적인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투표인단의 집단지성도 분명 반영돼 있을 것이다. 결국 시상식이나 수상 그 자체도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이자 액션의 일환이고, 그것을 또 다른 말로는 ‘시대정신’이라 부른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뮤지션인 배드 버니는 순수 스페인어 앨범 ‘Un Verano Sin Ti’로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올랐다. 이는 배드 버니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현재 미국을 휩쓸고 있는 라틴 음악, 그중에서도 푸에르토리코 뮤지션들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반영한 결과로 봐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는 라틴 음악조차도 수십 년째 미국 주류 대중음악의 역사와 늘 함께했던 주요 장르이자 흐름이다. 그에 반해 K팝은 전 세계적인 인기에도 미국 내에서 영미권 혹은 라틴 음악과 아프리카계 음악들에 비해 인종적·문화적·언어적 기반이 대단히 불리하다. 틈새시장 전략을 통해 주류 시장을 우회적으로 타격하고 있으나 산업적이나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방탄소년단이 수상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음악성 때문이라기보다는 K팝이라는 장르 혹은 산업 전체의 저변과 지배력의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트렌드는 놀랍도록 빠르게 변한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유의미하게 성장한 시장은 라틴 음악 시장과 아시아 음악 시장 정도에 불과한데, 특히 소셜미디어 등 뉴미디어의 발달로 촉발된 이른바 문화산업의 탈미국화·탈중심화는 K팝이 미국이나 영국 등의 제도권 산업을 직접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가 된다. 당연히 그래미의 위상도 이제는 새롭게 평가해볼 수 있게 됐다. 대중음악 메카인 미국의 산업 ‘인사이더’들이 수여하는 그래미의 상징성은 그들 안에서 여전히 건재하나, 그들의 인정이 K팝의 성공을 가늠하는 절대적일 기준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아카데미나 에미의 인정과 무관하게 넷플릭스에서 연일 맹위를 떨치듯, K팝 시장 역시 미국 주류 시장의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흐름이 더욱 공고해짐에 따라 그래미가 이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날도 분명히 올 것이다. 늘 그랬듯, 그래미는 가장 늦게 유행에 올라타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정말로 한국 가수가 그래미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날을 꼭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K팝 세계화의 선행조건일 이유도, 성공에 대한 어떤 절대적 인증서가 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K팝 가수들이 언제쯤 그래미를 탈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 ‘과연 K팝에 그래미 트로피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도 그것이다. 트로피는 얻지 못했지만 방탄소년단은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