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차례·제사 생활 [김동진의 다른 시선]
  •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2 14:05
  • 호수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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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평등한 방식으로 고인을 기리는 문화 얼마든지 가능해

[편집자 주] 지난 1년 동안 연재되었던 남인숙 작가의 ‘남인숙의 귀여겨듣기’에 이어 이번 주부터 김동진 작가의 ‘김동진의 다른 시선’이 새롭게 연재됩니다. 필자 김동진은 여성 학자이자 작가로서 현재 ‘페페연구소’ 대표로 있습니다.

 

# 어느 차례 풍경 1

A씨는 결혼 전에는 제사나 차례를 지내본 적이 없다. A씨의 원가족은 기독교였고, 가끔 간단한 추도예배만 드렸다. 그런데 결혼하고 처음 보내는 명절에 배우자인 B씨네 집에서는 차례를 지낸다고 했다. A씨는 약간의 문화체험을 하는 기분과 더불어 차례에 관한 호기심이 생겼다. 명절 전날 아침부터 시가의 큰집으로 가서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는 등 음식을 만드는 노동을 여자들끼리 하고, 명절 당일 아침에 또 일찍 가서 많은 종류의 음식을 차례상으로 차려냈다. 주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 B씨네 집에서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기만 하는 존재이지 차례에 낄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것을. 주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차례 끝났으니 그릇 치워요’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황당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어느 차례 풍경 2

A씨는 이번 명절에는 기필코 차례상을 구경이라도 한 번 하리라 마음먹고, 차례상이 차려진 방 안을 기웃거렸다. 차례상에는 고기며 생선이며 나물이며 전이며 기타 반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좀 전에 주방에서 ‘제사상에 이런 것도 놓나’ 하고 신기해하며 뜬 밥과 국, 수저까지 놓여 있었다. 잘 차려진 차례상을 보며 A씨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고, 차례가 굉장히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부모를 위해 이렇게 맛있는 음식상을 차려주고, 게다가 따뜻한 밥과 국과 수저까지 놓아준다면? 정말 기분 좋겠다, 정말 위로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느 기일 풍경

A씨는 아빠의 산소와 엄마의 납골당에 1년에 한 번 기일에만 찾아간다. 부모님이 친척들과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A씨도 오랫동안 친척들과 왕래하지 않았고, A씨의 남자 형제와는 유산 분배 문제로 싸운 후에 연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A씨는 배우자와 두 자녀들과 함께, 기일에 꽃을 들고 산소와 납골당에 간다. 묘 앞에, 납골당에 모신 항아리 앞에 서서 잠깐 기도를 한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가족 모두 소리 내어 한마디씩 얘기하듯 재미있게 기도했고, 자녀들이 조금 큰 다음에는 각자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다녀오면서 밥은 사먹는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납골당에 다녀올 때는 아예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여행하며 다녀오기도 했다. 음식을 차릴 일은 전혀 없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고인(故人)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든, 명절에 후손들끼리만 잘 차려 먹기 미안해 지내기 시작했던 차례든, 기독교인들이 하는 추도예배든 혹은 추도식이든, 그 행사들의 공통적인 의미는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것이다. 즉 고인과 내가 맺었던 삶의 관계 속에서 그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생전에 고인과 내가 함께했던 좋은 추억이 있다면 기억해 보고, 고인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인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일이 바로 고인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제사, 차례, 추도식과 같은 의례는 바로 고인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차를 해당 문화권에서 정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 특히 명절이란 어떤가. 명절 직후 이혼율이 상승한다는 뉴스는 너무 많이 봐서 이제 새롭지도 않다. 당신이 한국 사회의 일원이자 누군가의 자녀라면, 여성들에게 무임금 가사노동이 평소보다 훨씬 더 집약적으로 집요하게 집중되는 날이 명절이라는 것을 이미 알 것이다. 사실 지금처럼 명절 차례상을 제사상처럼 거하게 차리는 것은 유교 전통도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해 살면서 변질된 문화다. 또한 유교 전통에 따르면 제사상은 남성이 차렸고, 배우자 여성 또한 제사의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사실상 지금의 명절 차례 문화는 변질된 유교 문화라며 성균관 담당자들은 억울해하고, 심지어 명절 차례상을 간소화하자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제 명절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볼 때

사실 위의 A씨는 필자다. 필자는 명절에 가는 큰시가의 부엌에서 남자들이 일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명절날 시가에서의 여성은 절대로 남성 배우자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 시골집 바깥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유독 그곳에는 시간이 조선시대 어딘가쯤에 멈춰있는 것 같다. 아무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그런 명절을 10년 넘게 보내고 나니 필자는 더 이상 배우자의 조상을 위한 명절 노동을 하러 명절에 시가에 가기 싫어졌다. 나도 존엄한 인간이니까.

그러면서 궁금해졌다. 왜 배우자네 집안 남자들은 자기 조상의 차례상을 자신들이 차리지 않는 걸까? 자기 부모를 위한 음식상은 자신들이 차리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또한 나만 해도 부모님 기일을 이렇게 음식상을 차려내는 노동 없이 보내고 있지 않나. 나만의 방식으로 부모님을 추모하면서. 여성만을 희생시켜 명절에 차례상을 차리는 방식 말고,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은 없을까?

기일의 제사상도 마찬가지지만 명절 차례상에도 무엇이든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면 되는 거라며, 그렇다면 마카롱이나 메로나 아이스크림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배우자에게 당신의 할아버지는 생전에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는지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필자도 부모님이 좋아하셨던 음식이 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자녀들에게 일러두었다. 나중에 엄마가 죽으면, 엄마 기일에 너희 둘이 만나서 엄마를 기억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고.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어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참고로 엄마는 삼겹살을 좋아한다고.

나와 내 가족, 내 주변의 명절, 제사, 차례, 고인의 기일 풍경을 생각해 보자.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삶의 전통 속에서 고인을 기리고 있는가? 만일 필자의 시가처럼 여성만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고인을 기리는 전통 속에 살고 있다면, 그 전통은 폭력적인 성차별주의일 뿐이다. 모두에게 평등한 방식으로 고인을 기리는 절차를 바꾸어 간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더 나아가 죽은 후에 나의 자녀, 지인,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도 생각해 보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 그리고 명절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 보자. 그렇게 하는 것이 전통이란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성차별주의를 없애 나가는 일이고, 그런 일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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