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콘셉트 입혀 글로벌 마케팅 성공한 K팝의 창시자 ‘이수만’
  • 전영선 중앙일보 K엔터 팀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1 10:05
  • 호수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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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떠나며 더 주목받는 이수만의 리더십
명예롭게 퇴장할 기회는 놓쳐

한 인물이 특정 사회나 산업, 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가늠할 때,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그의 부재(不在)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겸 전 총괄 프로듀서(71)가 존재하지 않는 평행 우주가 있다고 해보자. 이 세계엔 우선 SM의 첫 기획 아이돌 그룹 H.O.T.(1996년 데뷔)가 없다. 이들의 대항마로 만들어진 대성기획(현 DSP)의 젝스키스도 없고, 아이돌 연습생과 합숙 제도, 훈육·양육·감시에 가까운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도 없을 것이다.

SM은 2000년 재수 끝에 상장 엔터테인먼트사 1호로 기록됐다. 당시 여의도 증권가에서 “무모하다”는 소리를 듣던 이 도전이 없었다면, 지금 K팝을 본업으로 하는 상장기업이 있었을까. 만약 있다면, 아마 현재 걸음마 단계일 것이다. 이수만이 없는 평행 우주엔 꼼꼼한 해외 진출 계획을 통해 일본 주류 가요시장을 뚫은 보아가 없다. K팝 해외 진출 성공의 기억, 그 시작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콘셉트 아이돌의 교과서 동방신기, 걸그룹 ‘끝판왕’ 소녀시대도 없다. SM 모델을 벤치마킹한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도 없거나 다른 형태였을 것이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전 총괄 프로듀서가 2월14일 ‘한·몽 경제인 만찬’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전 총괄 프로듀서가 2월14일 ‘한·몽 경제인 만찬’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핑크 블러드’가 챙기는 프로듀서

물론 역사의 흐름은 한 사람의 존재나 부존재, 선택과 결단만으로 확정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수만에게 가장 적대적인 사람도 그가 K팝 산업에 미친 영향을 부인하진 않는다. 이수만은 K팝 산업 비즈니스 모델의 창조자이자 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수만은 가능성이 꽃피던 가요에 한국형 관리형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더했고, 이는 독립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눈으로 보는 음악, 상품으로서의 대중음악, 직접 참여자로서의 팬에 대한 그의 비전 없인 어려웠을 일이다. 창업 초기 이수만이 벤치마킹한 일본 아이돌이 적당히 안락한 내수시장에 만족하는 동안, K팝은 글로벌 무대로 나가 보편적으로 통하는 하나의 장르가 됐다. 비좁고 경쟁이 지독한 국내시장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을 탐색했고, 음악이 음원 형태로 무료 공급되기 시작하자 음반을 굿즈(Goods) 형태로 만들면서 사업 모델을 개조했다. 한국의 기획사는 가수를 찍어내는 ‘공장’이라는 비판 속에서 독특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정비해 오면서 살아남았고, 이 생존기 선두엔 항상 이수만이 있었다.

긴 업력 덕에 SM엔 ‘에스엠빠’를 자처하는 집단, 일명 ‘슴덕’(SM과 덕후의 합성어)이 활약 중이다. 이들의 혈관엔 SM의 상징색인 분홍색 피, ‘핑크 블러드’가 흐른다고 한다. SM이 내는 아이돌을 좋아하고 신인을 기다리는 슴덕들은 이수만을 ‘K팝의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며 그의 유산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 엔터사 시가총액 1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을 보유한 하이브조차 갖지 못한 존재들이다. 아미(BTS 팬덤)는 열정적으로 BTS를 좋아할 뿐, 하이브 팬은 아니다. 중소 기획사를 인수합병(M&A)한 뒤 멀티레이블 시스템으로 급성장한 하이브와 달리 SM은 창립자이자 총괄 프로듀서 이수만을 주축으로 H.O.T., 신화, 동방신기, 소녀시대, 엑소 등 여러 가수를 히트시키며 SM이란 브랜드를 다져왔다. 일찌감치 아이돌 그룹에 세계관 마케팅을 처음 도입했고,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비난 속에서도 끈기 있게 고집해 왔다.

기업 내부 결속력도 다른 기획사엔 없는 SM만의 특징이었다. 소속 아티스트와 직원이 함께하는 사내 행사는 SM타운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피와 살, 혼을 공급해 왔다. 단합대회, 핼러윈데이 코스튬 파티, 굳이 소속 가수 전원이 무대에 오르는 ‘SM타운 콘서트’와 같은 연례 행사가 이 중 일부다. 수익만이 목표라면 현재 가장 강력한 팬덤, 다른 말로는 가장 돈을 많이 쓸 팬덤이 있는 팀의 단독 콘서트가 남는 장사다. 이런 문화가 좋건 싫건, 이수만 전 총괄이 구심점으로 존재해 유지할 수 있었던 문화다. 하지만 SM에서 최근 이수만 시대의 종언을 알린 이상, 이런 문화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됐다.  

 

변심 막을 수 있었던 ‘막장 드라마’

라이크기획은 이수만 시대의 끝을 앞당긴 결정적 약점이 됐다. 이수만은 SM 1대주주였지만 “프로듀싱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2010년 이후 공식 직책을 맡지 않았다. 총괄 프로듀서라는 직함은 SM이 이수만의 개인 사업체인 라이크기획과 맺은 계약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수만은 SM으로부터 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라이크기획을 통해 매년 수수료 200억원 이상을 받아왔다. 2021년 기준 이수만이 라이크기획을 통해 받은 수수료는 240억원이었는데, 이는 SM의 연간 영업이익의 3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문제는 지난해 행동주의펀드 얼라인파트너스가 이슈화해 이수만과 SM의 계약 조기 종료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계약 종료가 공식화되기 전 SM 경영진은 라이크기획 수수료의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이수만을 방어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이수만의 최측근, 이성수 SM 공동대표(44)를 비롯해 ‘이수만의 사람들’이라 불리는 이사진 덕에 펼칠 수 있었던 논리다. 지난해 3월 이성수 대표가 출연한 유튜브 삼프로TV의 ‘이수만 리스크’ 편에선 이런 면이 극적으로 드러났다. 이 대표는 “이수만 프로듀서 같은 사람을 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제일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순간,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는 SM의 기업으로서의 영속성, 축적한 시스템과 경쟁력을 한꺼번에 부인한다는 인상을 줬다. 이 대표는 “SM이 이수만 대표를 다른 기업에 빼앗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수만 프로듀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던 이 대표까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SM의 미래가 하이브든 카카오든, 이 대표와 이수만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이브 측이 SM의 새 이사 명단을 제안한 2월16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이수만의 모든 치부를 까발린다고 저격했다. 이날 이 대표는 “선생님이란 호칭도 생략하겠다”면서 그와의 대화 녹취를 풀었고, 이수만의 비리 의혹과 그의 여자친구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열정적으로 비난했다. 불과 몇 달 전엔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다. 3월 말로 예정된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 SM은 이수만과 손잡은 하이브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주총에선 대립각을 세웠던 얼라인파트너스와 SM을 세운 창업자를 협공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만약 라이크기획 리스크가 처음으로 제기된 2019년 이수만이 이를 심각하게 보고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최소한 SM 창업자가 최대 경쟁사를 찾아가 자신의 지분을 넘기고, SM이 이를 ‘적대적 인수합병’이라고 하는 ‘막장 드라마’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수만이 아름다운 퇴장 타이밍을 놓치면서 그동안 쌓아온 SM 브랜드에도 상당한 상처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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