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공짜 지하철’이 있어 다행입니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7 08:35
  • 호수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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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노인들의 성지 1호선 온양온천역·지하철 실버택배 밀착취재
“왕복 6시간 지하철로 온천욕 하고 국수 사먹어…생의 유일한 낙”
10시간 택배로 2.5만원 벌어…무임승차 폐지되면 절반 날아가
2월17일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역에서 내린 노인들이 대중 목욕탕으로 이동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2월17일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역에서 내린 노인들이 대중 목욕탕으로 이동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빡빡한 출근시간을 갓 넘긴 오전 9시30분. 신창행 1호선 열차에 모자를 쓰고 배낭을 둘러멘 여행자들이 하나둘 몸을 싣는다. 도심과 멀어질수록 듬성해지는 일반 좌석과 달리 양 끝 노약자석은 이들로 인해 내내 빽빽하다. 유선 이어폰을 꽂은 채 유튜브 영상을 둘러보고, 간혹 소설책이나 종이신문을 펼쳐 읽기도 한다. 꾸벅 졸기도 하고, 처음 만난 옆 사람과 어제 만난 듯 이야기하기도 한다. 안양-수원-오산-평택-천안을 지나며 오전 시간도 온전히 흘러간다. 종점에서 딱 하나 앞선 온양온천역에 다다라서야 이들은 굳은 허리를 편다. 줄지어 우대용 교통카드를 찍고 1번 출구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곳엔 5000원으로 즐길 수 있는 작은 대중목욕탕과 5000원으로 먹을 수 있는 시장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그걸 ‘만원의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1호선 풍경을 가능케 하는 건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 대한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다. 서울에서부터 이들의 ‘성지’인 온양온천역까진 왕복으로 요금 6000원이 든다. 하지만 노인들은 몇 번이든 공짜로 오간다. 만원의 행복이 가능한 이유다. 역 근처 목욕탕 주인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탕이 꽉 찬다. 절반 이상이 서울에서 온 손님들”이라며 “매일 여기 발도장 찍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걸 이들도 잘 알고 있다. 기자가 1호선 열차에서 만난 노인들은 “우리 때문에 지하철 적자가 쌓인다고 하더라. 동네에서 놀지 뭣 하러 멀리 다니냐고 하는 것도 안다”고 말을 먼저 꺼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하철이 공짜라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수십 년 세월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는데 날마다 주어지는 하루는 어찌나 긴지, 매일의 지하철 여행이 그저 고마운 ‘시간 도둑’이란 얘기다.

“집에 머물다 우울증…건강과 행복 찾았다”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79세 김순찬씨(가명)도 매주 월·수·금 오전 9시 집을 나서 온양온천으로 향한다. 1호선 5-4칸 노약자석 끝자리는 그의 고정석이다. 그렇게 왕복 6시간 열차에 몸을 실은 지 6년이 되었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게 정확히 6년 전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매일 나서고 싶지만 화·목은 반나절 노인 공공근로가 있다. 주 3일 온양온천행은 한 달에 20만원 남짓한 수입으로 부리는 유일한 사치다. 온양시장에서 5000원짜리 칼국수를 사먹거나, 온양온천역 내 맞이방(라운지)에 앉아 TV를 보며 집에서 싸온 빵과 삶은 달걀로 점심을 때우기도 한다. 의자 20여 개가 놓인 맞이방은 김씨와 비슷한 이들로 대부분 자리가 차 있다. 목욕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7시, 하루가 훌쩍 지나 있다.

“집에만 있으면 시간이 4배로 느리게 간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던 코로나19 땐 몸도 아프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3일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은퇴 전 제약회사에서 영업일을 했던 김씨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야 힘을 얻는 성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자신과 비슷한 노인들이 각지에서 모여드는 온양온천에서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다고도 말한다. 그는 “가끔 지하철 6시간 타기가 버거운 날도 있다. 새마을열차 타면 1시간에도 다녀올 수 있지만 그건 비용이 부담스럽다. 지하철도 공짜가 아니었다면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다녀왔을 것”이라며 “젊은 친구들한텐 미안하지만 혼자 사는 노인들 일상엔 지하철 여행만 한 낙이 없다”고 전했다.

실제 한국교통연구원의 2014년 연구에선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제도가 노인들의 외부활동을 촉진시켜 우울증을 감소시키는 등 3206억원의 사회적 편익이 발생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현재 첨예한 논쟁 속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하철 무임승차는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가장 ‘고효율’의 복지”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지하철 적자 문제도 복지적인 시각으로 접근해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된다.

2월17일 서울의 한 지하철 승강장에서 실버택배원 어르신이 짐을 든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2월17일 서울의 한 지하철 승강장에서 실버택배원 어르신이 짐을 든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무임승차 폐지되면 택배 일도 사라질 것”

누군가에게 생의 기운을 더해 주는 지하철 무임승차는 또 누군가에게 생계 그 자체를 유지시켜 주기도 한다. 서울시 중구 중부시장 안쪽에 위치한 한 건물은 매일 꼭두새벽부터 생계를 지키기 위해 나선 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직접 지하철로 택배를 운송하는 ‘실버택배’ 기사들이 일감을 받는 ‘실버퀵택배’ 사무실이다.

오전 9시. 이미 10여 명의 실버 기사가 순서대로 떠나고, 남은 6명이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콜을 기다린다. 드디어 박평서씨(가명·84세) 차례다. 출근 1시간여 만이다. 1호선 회기역에서 물건을 받아 독산역으로 가져다주는, 비교적 쉬운 일이 연결됐다. “어젠 천안까지 다녀왔다. 거리가 너무 멀어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혼잡한 시간대에 케이크나 꽃다발 같은 망가지기 쉬운 물건을 배송해야 할 때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힘든 건 찾아가기 어려운 골목이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주소로 찾아가야 할 때다.”

혹여 늦을까 싶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박씨의 여정을 함께 따라나섰다. 을지로4가역에서 노선을 한 번 갈아타고 30분 거리인 회기역으로 향했다. “보통 여기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을 갈아타는데, 난 2호선 왕십리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회기역으로 간다. 그게 환승할 때 걷는 거리도 짧고 시간도 덜 걸린다. 오래 다니면서 얻은 노하우다.” 60세까지 목수 일을 하며 해외생활도 했던 박씨는 점점 일거리가 줄자 은퇴 후 건물 경비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이가 허락되지 않자 5년 전부터 실버택배 일을 시작했다.

회기역에서 물건을 받아 다시 열차를 타고 50분, 독산역에 도착했다. 늦지 않게 물건을 전달하고 현금으로 1만1000원을 받는다. 수입은 박씨와 회사가 7대3으로 나눠 갖는다. 다음 일감을 얻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도중 또 하나의 콜이 들어왔다. 이번엔 7호선 숭실대입구역 인근에서 물건을 넘겨받아 대림역으로 가져다주어야 하는 일이다. 어느덧 정오를 넘겨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박씨는 열차를 기다리며 가방에서 챙겨온 빵을 꺼내 끼니를 때운다. “점심 사먹을 돈도 아쉽고, 무엇보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꼭 때맞춰 콜이 들어온다. 나온 음식을 한 입 뜨고 서둘러 나온 적이 여러 번이라 마음 편히 빵을 먹거나 아니면 사무실로 복귀해 1000원을 내고 라면을 끓여 먹는다.”

한 시간에 걸쳐 두 번째 임무도 완수한 박씨는 1만1000원을 추가로 번 후 을지로4가역 사무실로 복귀했다. 또 한 번 기다림의 시간을 가진 그에게 이번엔 장례식장으로 근조기를 배달하는 일감이 건네졌다. 무게 5kg의 근조기를 들고 다시 1시간 거리의 이대목동병원으로 향했다. 오후가 되면서 열차 내 사람들이 제법 붐비기 시작했다. 박씨는 노약자석에 앉아 근조기를 세로로 세워 다리 사이에 고정시켰다. 한 손으로 근조기를 잡고 한 손으로 언제 울릴지 모를 휴대전화를 든 채 잠시 눈을 붙였다. 예정대로 근조기를 전달하고 이번엔 1만5000원을 받았다. 배송 물품이 크고 무거울수록, 혹은 배송 거리가 멀수록 비용은 조금씩 올라간다.

사무실로 복귀해 오늘 벌어들인 수입을 정산한다. 회사에 30%를 떼어준 후 박씨의 수중엔 2만5900원이 남았고 휴대전화엔 오늘 하루 걸음 수 2만1300보가 찍혔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6시 퇴근하기까지 시급 2500원인 셈이다. 이날 박씨와 동행한 기자의 지하철 요금은 총 5500원. 박씨의 출퇴근길까지 함께했다면 하루 8000원의 지하철 요금이 부과되었을 것이다. 이날 박씨가 얻은 수입의 3분의 1에 달한다. 주 6일, 일요일만 빼고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온종일 곳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그는 “운동도 되고 적지만 용돈도 벌어서 좋다. 다리가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생계와 직결되는 지하철 무임승차 논쟁과 관련해선 “무임승차가 사라지는 건 실버택배라는 우리 업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라며 “기자가 오늘 사무실에서 만난 노인 중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금은 다른 시각

“무임승차 혜택 받는 고소득 노인들은 10배로 베풀자”

오종남 서울대 명예주임교수는 6년 전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발급받으며 스스로 두 가지 다짐을 새겼다. ‘짐이 아닌 도움이 되는 ‘어르신’이 되자.’ 그리고 ‘이 카드를 통해 지하철 요금 혜택을 받는 만큼, 그 요금의 최소 10배를 필요한 곳에 베풀자.’ 그는 “카드를 발급받은 후 그냥 장롱에 넣어둘까, 아니면 사용하되 그 이상으로 사회에 돌려줄까 한참 고민한 후에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지금도 자주 지하철을 이용하는 오 교수는 꾸준히 이 ‘되로 받고 말로 돌려주는’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평소 그가 강조해온 ‘적자(赤字)생존’, 즉 ‘적자(손해) 보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철학과도 자연히 연결되는 모습이다.

오 교수는 일상 속 배려로 노약자석에 앉지 않고, 젊은 승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일반좌석에서도 멀찌감치 떨어져 선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나라는 급격한 경제 발전의 대가로 효(孝)·우애·협동, 그리고 배려의 가치를 잃어버렸다”며 “배려의 회복을 위해 우리부터 좀 더 배울 점이 있고 보탬이 되는 노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소득이 있는 노인들을 향해 자신처럼 요금의 10배를 사회에 베푸는 ‘배려 운동’에 동참하길 적극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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