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고 위대한 계약’의 산물, 파주 출판도시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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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출판 암흑기 속 신뢰·존중으로 조성된 ‘굴뚝 없는 산업단지’
무형의 ‘독서 문화’ 유형화에 성공…시대 발맞춘 도약 고민할 때
파주 출판도시 거리 풍경 ⓒ김지나
파주 출판도시 거리 풍경 ⓒ김지나

파주시 심학산의 자락, 문발동 일대에는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있다. 이제는 파주를 대표하는 산업단지이자 나들이 장소로도 유명한 파주출판도시다. 보통의 산업단지와 다르게 ‘도시'란 이름이 붙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처음 생길 당시에는 ‘굴뚝 없는 산업단지’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그 이름에 걸맞게 명실공히 우리나라 ‘출판’의 중심이자, 출판인과 건축가가 함께 만든 ‘도시’가 돼있다.

언젠가 처음 출판도시를 방문했을 땐 범상치 않은 외관의 건축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어쩐지 삭막하다고 느꼈다. 건축학도들에게는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귀한 답사지라고도 했다. 하지만 문외한의 눈에는 마치 여느 드라마세트장이 연상되는 풍경일 뿐이었다. 국내의 유명한 출판사들이 다 모여 있다고 하나, 출판업계에 몸담고 있지 않은 이상 이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점도 이런 첫인상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그럼에도 주말에는 유명한 건축가가 디자인한 뮤지엄이며 아기자기한 카페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산업단지가 일반 시민들도 즐겨 찾을 수 있는 곳이 된 사례는 흔치 않다. 문화를 생산해내는 터전에 세심한 공간계획이 뒷받침되면 어떤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파주출판도시다.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의 작품이다. ⓒ김지나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의 작품이다. ⓒ김지나

자유 열망에서 출발한 전무후무한 도전

지난해 봄, 파주출판도시의 탄생배경과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한편 개봉했다. 제목은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위대한 계약'이란 것은 출판도시 출범에 참여한 출판인과 건축가들이 2000년에 서약한 선언문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자신들의 협약을 스스로 ‘위대하다’ 표현하는 것에서 굉장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한편으론 무엇이 그렇게도 위대한 것이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하다.

계약서의 내용은 무엇보다 서로 간의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협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출범한지 20년이 지난 시점에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도전적이고 전무후무한 과업이었음을 시사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니, 이 계약서의 내용은 충실하게 지켜졌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참여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던 프린스턴대학의 알레한드로 자에라-폴로 건축가는 파주출판도시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드문 프로젝트였다고 회고했다.

출판이 감시의 대상이었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 파주출판도시를 처음 구상하게 된 그 시절이다. 저렴한 비용과 업계 간의 긴밀한 협업을 위해 파주로 터전을 옮겼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더 깊은 속사정이 있다. 언론의 지독한 암흑기였던 당시, 다큐멘터리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책과 글을 펴내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움직임은 자유롭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우리만의 도시를 세우자는 구체적인 구상으로 발전했다. ‘위대한 계약’은 곧 ‘위험한 계약’이라 불렸다.

그러나 위대했던 청사진과 달리 파주출판도시를 바라보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비전문가의 눈에 비친 부정적인 첫인상이 그저 첫인상에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이곳이 얼마나 ‘책 문화’로 특화돼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생산의 측면에서는 분명 독보적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내에 만들어진 '지혜의 숲'. 사람들이 로비에서 자유롭게 책을 가져와 읽을 수 있게 조성돼 있다. ⓒ김지나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내에 만들어진 '지혜의 숲'. 사람들이 로비에서 자유롭게 책을 가져와 읽을 수 있게 조성돼 있다. ⓒ김지나

크리에이터의 세상, 또 한 번 ‘위대한’ 고민 필요한 때

2007년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와 함께 오픈한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은 객실 내에 텔레비전을 없애고 대신 책장을 들였다. 2014년에는 천장 끝까지 가득 채운 책들이 마치 숲을 연상시키는 ‘지혜의 숲’이 조성됐다. 지혜의 숲은 24시간 운영되며 책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다. 독서라는 무형의 문화를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재현해낸다면 상상할법한 모습이 그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리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도 책과 종이가 주는 아날로그의 힘은 여전할 것이란 전망들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개인 태블릿PC가 일상용품이 되고 전 세계 어떤 책이든 e북으로 순식간에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는 시대다. 월정액을 지불하면 책 한권 값으로 몇 권이든 원하는 대로 읽을 수도 있다. 넘쳐나는 OTT 서비스는 텔레비전이 없어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얼마든지 책 이외의 즐길 거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한다.

책과 디지털 매체는 더 이상 서로 배척되지 않는다. 종이로 엮어내는 것만이 출판이란 생각도 구시대적이다. 바야흐로 개인이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 크리에이터의 세상이 왔다. 파주출판도시는 잠재적 크리에이터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새로운 ‘위대한 계약’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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