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發 민심 이반 우려? 전방위적 ‘기업 팔 비틀기’ 들어간 정부
  • 허인회 기자 (underdog@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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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식품·은행·통신 등 대대적인 조사 착수
“소비자 후생 떨어지고 주주 이익 침해할 수도”
서울의 한 마트에 진열된 소주 제품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의 한 마트에 진열된 소주 제품의 모습 ⓒ연합뉴스

정부의 고강도 압박에 기업들이 손을 들었다. 가격 인상을 고려했던 식품, 주류 업체들이 잇따라 보류하거나 철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의 공개적인 압박 속에 “소비자의 부담을 덜어드리겠다”며 한 발 물러서고 있다. 하지만 원부자재, 물류비, 인건비 등 제조비용 증가에 따른 부담을 언제까지 기업이 떠안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때문에 시장경제를 표방한 정부가 과도하게 시장 개입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27일 소주 업계 1위인 하이트진로는 “당분간 소주 가격을 인상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주값 6000원’ 시대가 임박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불만이 팽배해지고, 정부가 실태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가 나오자 동결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맥주업계 1위인 오비맥주도 “당분간 맥주 가격 조정은 없다”고 밝혔다. 당초 맥주는 오는 4월 주세가 리터당 30.5원 오르면서 출고가 조정이 불가피할 전망이었다.

내달 1일 ‘풀무원샘물’과 ‘풀무원샘풀 워터루틴’ 등 생수제품 출고가를 평균 5%씩 인상할 예정이었던 풀무원도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풀무원은 “고물가 속 소비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라 내부적으로 논의한 끝에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원재료 가격 상승 부담이 가중되며 지난해 당기순손실 421억원을 기록했음에 가격 인상을 없던 일로 한 것이다.

식품·주류 업체들이 잇따라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한 데는 정부의 강력한 자제 압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6일 기획재정부는 주류업계가 소줏값을 인상할 움직임을 보이자 현재 소주 가격 인상 요인을 점검하고 인상 동향과 기업 수익 상황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주류업계를 담당하는 국세청은 주류업체들과 소통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비공개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주류 업계는 이 같은 정부 행보에 적잖이 부담스러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식품업계의 상황도 비슷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8일 식품업계와 물가안정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해에도 식품업계를 대상으로 5차례나 간담회를 갖고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한 바 있다.

업계에선 고물가로 성난 민심의 화살을 기업에게 전가하려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올해 들어 물가를 다시 뛰게 만든 주된 요인이 난방비를 비롯해 공공요금”이라며 “고물가 상황이 진정되지 않자 기업을 희생양 삼아 여론을 진정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시중 음식점이나 술집 등 점주들이 정하는 소주 가격에 대해 지나치게 제조사에게만 문제를 삼으려 했던 것 아니냐”며 “출고가 인상 요인은 쌓이고 있는데 어느 시점까지 동결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28일 12개 식품업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물가안정 간담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28일 12개 식품업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물가안정 간담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시장 개입, 장기적으로 정부 신뢰 저하 계기될 수도”

기업을 상대로 한 압박은 식품·주류 업체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7일 공정거래위원회 카르텔조사국은 신한·KB국민·하나·우리·NH농협·IBK기업은행 등 6개 은행에 대한 현장 조사에 착수했다. 예대 금리 차이나 수수료 등을 담합했는지 여부를 살피기 위함이다. 같은 날 공정위 시장감시국은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 조사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런 전방위적인 기업 압박이 장기적으로는 정부에 득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무언의 압박을 통해 기업의 인상 여부를 통제하는 것은 정부 개입을 통해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학습 효과를 심어줄 수 있다”며 “정부 만능주의를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가 향후 작동하지 않을 경우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장 개입이 결국엔 국민들에게도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박 교수는 “적자를 감수하게 될 기업은 결국 양이나 개수를 줄이는 등 제품의 질을 떨어트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결국 소비자 후생이 더 안 좋아질 뿐”이라면서 “동시에 기업의 이익과 주주들의 이해를 정부가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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