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뚫고 대세가 된 여성 뮤지컬 ‘붐’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04 14:05
  • 호수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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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작품의 새로운 지평 연 《실비아, 살다》…《웨이스티드》 《앤ANNE》 《SIX》 등도 인기

뮤지컬의 주 관객층인 20·30대 여성의 소비 성향이 최근 몇 년간 뚜렷하게 바뀌었다. 관객이 여성이기에 티켓 파워를 가진 남자배우를 기용하면 흥행이 보장될 것이라는 업계 불문율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특히 대학로 중심의 중소형 공연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 추세다.

이는 여성 캐릭터가 단독 주연을 맡거나 출연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작품들이 뮤지컬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성 캐릭터는 매력을 가진 남성 캐릭터를 동경하는 상대역에 머무르며 만족해야만 했다. 남성 예술가의 일방적인 로맨스 대상으로 그려지면서 수동적인 ‘뮤즈’ 역할에 그친 사례도 많았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연극열전 제공
뮤지컬 《웨이스티드》 ⓒ연극열전 제공
뮤지컬 《웨이스티드》 ⓒ연극열전 제공
뮤지컬 《웨이스티드》 ⓒ연극열전 제공

시스터후드가 주는 재미와 감동

뮤지컬은 유난히 서구의 위인전을 내용으로 삼은 작품이 많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왕가의 인물, 정치가, 예술가 등 많은 영웅적 인물이 과거에는 대부분 남자였지만 이제는 여성이 대신하고 있다. 특히 남성 중심의 세계관과 사회 속에서 유리천장을 뚫고 일어서는 드라마틱한 삶을 그린다. 여성이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계속 도전하고 의미 있게 좌절하는 서사를 가진 주체적인 시각의 여성 모습이다.

얼마 전 한국 초연을 가진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19세기 영국 작가 브론테 자매(The Bront) 무대에서 세 자매는 강렬한 록 뮤지컬 형식을 추구하는 반면, 브랜웰은 상대적으로 코믹하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주고받으며 극의 긴장감과 재미를 추구한다. 객석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고 매회 브론테 자매들의 패기 어린 도전에 공감했고 의미 있는 좌절에 안타까워하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2017년 대학로에서 초연돼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앤ANNE》도 인기가 많다. 극단 걸판의 창작뮤지컬로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 머리 앤》(원제 ‘그린게이블스의 앤’ 1908)을 극 중 걸판여고 연극반이 무대에서 공연한다는 설정의 극중극이다. 극 중 시기별로 세 명의 배우가 담당하는 3인 1역의 ‘앤’들은 마치 브론테 자매처럼 따로 또 같이 우정과 연대를 표현하는 시스터후드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갖추었다. 백년이 넘는 원작의 시대 배경을 현재 한국으로 옮겨도 크게 이질감이 없다. 이 작품 역시 여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앤 역할을 맡는 반짝반짝 빛나는 신인 여배우들이 매 시즌 관객들의 눈에 띄는 작품이기도 하다.

얼마 전 두 번째 시즌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졌지만 불운한 삶을 산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1931~1962)의 실화를 기반으로 그가 남긴 시와 소설 내용에 음울했던 시대의 정서를 가미한 작품이다. 실비아는 영국의 시인 테드 휴즈(1930~1998)와의 첫 만남과 사랑, 결혼에 이르며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가졌지만 정작 가장 좋아하는 글쓰기와 가사노동을 병행하면서 고난에 처하게 되고 점차 좌절하게 된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실비아의 상황을 담아낸 자전적인 시는 실비아가 세상을 떠난 후 모음집으로 출간돼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생전에는 자존감도 영광도 크게 누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모습이 무대 위에 잘 담겨 있다.

공연계에서는 2018년 ‘미투(#MeToo)’ 이후에 페미니즘을 내건 뮤지컬이 대거 관객에게 소개됐다. 안티 페미니즘과 보수화를 기치로 내건 소위 ‘이대남’들의 반작용도 있지만 비주류에 속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공연 장르에서 여성 주도의 소비층을 기반으로 여성 서사를 다루는 작품 제작이 위축되지 않고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오히려 여성주의 작품이 늘어나며 공연계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차별받으며 연민을 자아내는 깨어있는 주인공이 성공하는 결론에 이르는 서사가 너무 흔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다. 어떤 경우에는 한 톨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남자와의 로맨스도 거부하며 정치적 올바름과 완벽한 위인의 신화를 추구하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새장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한 점에서 《실비아, 살다》가 지난해 초연되며 주인공 실비아 플라스를 통해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실비아가 남긴 예술은 뛰어났지만 예술가는 완벽하지 않았으며 당시 시대와 사회, 가정이 주는 책임의 무게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았다. 여성이기 이전에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예술가의 불완전성에 대해 젠더 이슈를 포괄해 이야기하는 뮤지컬에 목말라 할 때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개성 있는 모습은 신선했고 여성주의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 연출적인 면에서도 두 남녀 앙상블 배우는 다역과 무대전환수 기능까지 담당했다. 작가 혹은 관객의 시각에서 관찰자의 감정을 가지고 연기하고 있어 자칫 어둡고 무겁기만 한 무대가 아니라 때로는 코믹하고 풍자적인 장면이 만들어진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 무대 한 장면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뮤지컬 《실비아, 살다》 무대 한 장면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뮤지컬 《실비아, 살다》 무대 한 장면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뮤지컬 《실비아, 살다》 무대 한 장면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은 여성들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국내 초연을 준비하고 있는 뮤지컬 《SIX》도 특별한 여성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국 왕실의 헨리 8세 재위 기간 동안 결혼했던 여섯 왕비의 삶을 팝 뮤지컬로 재구성했다. 왕인 남편의 그늘에 가려 역사적인 평가가 인색했던 여성들 내면의 이야기를 픽션화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위인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간적 진면모가 부각된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흔들리고 상처받는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맘마미아》와 《호프》도 모두 봄 시즌이 시작되는 이번 달에 다시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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