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먹먹한 “다녀오겠습니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05 13:05
  • 호수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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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는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위로

신카이 마코토는 ‘시’처럼 다가온 애니메이터였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시속 5센티미터라는 것도, 만화로 그려낸 햇살과 빗방울이 그토록 서정적일 수 있다는 것도, 빌딩 숲과 전깃줄에 짙은 정서가 깃들 수 있다는 것도 그의 작화를 통해 알았다. 감정의 애틋함으로 서사의 흠결을 메우는 것 역시, 신카이 마코토의 인장 중 하나였다.

그런 그의 초기 작품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상실의 정서’였다. 신카이 마코토의 인물들은 시공간의 제약 안에서 서로 그리워하다가 끝내 이별하거나 만나지 못했다. 《별의 목소리》(2002)에서 우주로 간 소녀를 기다리며 2G폰으로 안부를 묻던 소년은 소녀가 지구에서 멀어지는 거리에 비례해 늦어지는 문자 수신의 시간과 싸우며 외로워 했고,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의 남녀는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 같은 예감을 달고 살았으며, 《초속 5센티미터》(2007)의 소년과 소녀는 편지 등을 통해 서로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보려 하지만 끝끝내 실패했다.

죽어서 곁을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2011)에서 감독은 인물들을 통해 이런 말도 했다. “상실감을 끌어안고 살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렸어. 그게 사람이 받은 저주야”(신), “하지만 분명 그건 축복이기도 할 거야”(아스나). 저주와 축복. 그 곁을 서성였던 신카이 마코토의 소녀와 소년들.

그런 상실의 기조에 변화가 감지된 건 《너의 이름은.》(2016)에 이르러서다. 몸이 뒤바뀌게 된 소년 타키(가미키 류노스케)와 소녀 미츠하(가미시라이시 모네)의 판타지에서 시작해 재난 드라마로 달려가는 《너의 이름은.》에서, 소년과 소녀는 서로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죽음까지도 막아낸다. ‘너’가 있는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너’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기어코 ‘너’와 다시 만나는 해피엔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동일본 대지진, 그 이후의 삶

이 변화의 배경엔 무엇이 있었나.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이다. 1만85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재난은 일본인들의 일상 감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비극은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세계에도 커다란 흔적을 드리웠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느린 속도에 기대 ‘변하지 않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온 신카이 마코토는 재난을 가까이에서 목격하며 “마을이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마을로 남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허핑턴포스트재팬’과의 2017년 인터뷰) 그건 그가 ‘견지해온 전제의 붕괴’였다.

한 세계가 비극적 사건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면, 도쿄도 언젠가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 사회에 드리운 집단적 내상을 위무하고 싶었던 창작자의 마음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을 이별한 상태로의 지속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 생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개인의 상실을 이야기해온 그의 작품세계가 ‘집단의 상실’로 확대된 것도 이때다. 알려졌다시피 《너의 이름은.》에서 한 마을을 지상에서 흔적 없이 지워버리는 혜성은 동일본 대지진의 은유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1600만 관객을 불러 세우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집단의 무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장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이 세상에 나왔다.

일본 규슈의 한적한 마을. 이모와 살고 있는 여고생 스즈메(하라 나노카)는 등굣길에 폐허를 찾고 있는 꽃미남 청년 소타(마쓰무라 호쿠토)를 우연히 만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이끌림. 스즈메는 그를 뒤쫓다가 폐허에서 낡은 문을 발견하는데, 마침 문에서 ‘미미즈’라는 거대한 힘이 빠져나와 지진을 일으키고, 스즈메는 소타를 도와 필사적으로 문을 닫는다. 알고 보니 소타는 미미즈를 문 안에 봉인해 재난을 막는 역할을 해온 ‘토지시’다. 대를 이어 토지시 역할을 해온 소타는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고양이 다이진의 저주에 걸려 다리가 3개인 의자로 변해 버리고,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재앙의 진원지에 출몰하는 고양이 다이진을 쫓기 시작한다. 거동이 불편해진 소타를 대신해 문단속을 해야 하는 건, 잠시 스즈메의 몫이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스즈메의 문단속》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영화가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는 이름은.》에서 그려진 ‘재난으로 사라져 버린 마을’들이 릴레이로 등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소들은 의미심장하다. 스즈메와 의자가 된 소타가 재난을 막기 위해 떠나는 여행길을 더듬어보자. 규슈(九州)→시코쿠(四国))→고베(神戸)→도쿄(東京), 그리고 이들의 여정은 스즈메가 어릴 적 살던 고향이자 동일본 대지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미야기(宮城)로 향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직접적인 형태로 재난을 이야기하는 ‘포스트 3·11’ 작품인 셈이다.

비극으로 사라져 버린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안간힘을 통해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려 했던 《너의 이름은.》처럼, 《스즈메의 문단속》은 폐허가 된 ‘공간’을 살다간 사람들을 스즈메의 의식을 통해 스크린에 다시 호출함으로써 망각된 이들을 위로한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집을 나섰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평범한 일상들. 이젠 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재난 이전의 시간 앞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온다면, 그건 일본 사회의 내상에 접속해 있는 영화가 지역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성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은 폐허가 재난의 문을 여는 진앙지라는 설정은, 비극을 쉽게 망각하거나 충분히 애도하지 않는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많은 것이 《너의 이름은.》의 자장 안에 있지만, 큰 차이가 있다. 《너의 이름은.》이 ‘만약에’라는 가정을 통해 비극을 기적처럼 되돌린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의 피해자이기도 한 스즈메가 트라우마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 더 집중한다. 그런 점에서 소타가 변신한 의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의 영화라면, 극 중 주인공이 조금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나무든 뭐든 임시 다리를 하나 붙여줬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타는 마지막까지 세 발로 달린다.

그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이전 상태로의 완벽한 회복’이 아니라,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위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뒤뚱뒤뚱 걷던 소타는 중반에 들어서 “이젠 (의자의 몸에) 적응이 돼서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식의 대사를 내뱉는데, 이는 그냥 끼워넣은 대사가 아닐 것이다. 세 개의 다리로 어떻게든 적응해 살아가야 하는 것. 재난 이후에도 삶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 상실을 딛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분명, 신카이 마코토는 ‘상실의 정서’를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화라고 하고, 누군가는 변질이라고 하지만, 비극이 한 예술가의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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