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빠지고…‘피해자 vs 피해국’ 충돌된 강제징용 배상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3.03.07 16: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해 생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 尹정부 규탄하며 반발
尹대통령, ‘제3자 변제안’ 실행 의지 밝힌 가운데 느긋한 日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3월7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을 마친 뒤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3월7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을 마친 뒤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마침표를 찍으려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안이 난관에 부딪혔다. 피해자 측과 시민사회가 정부의 '제3자 변제안' 해법에 강력 반발하면서 양국 관계의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조짐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외교부는 이번 해법이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고 '미래'로 나아가는 주춧돌이 될 것이라 자신했지만, 한국 정부가 피해자 목소리를 외면한 채 전범기업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윤 대통령은 7일 용산 대통령실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전날 발표한 정부의 강제징용 배상 해법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며, 후속 과정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한·일 간의 미래 지향적 협력은 한·일 양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3·1절 기념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했다. 

외교부의 '제3자 변제안'이 발표된 후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이날 윤 대통령은 피해자들의 반발을 비롯한 후폭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미래'만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해법안 도출을 높이 평가하며 역대 정부가 풀지 못한 사안을 해결한 '폭탄 처리'라고 평가했다. 

3월7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서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 등 참석자들이 관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3월7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서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 등 참석자들이 관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 대법 판결 원고들 만나 설득…법정 공방 불가피 

피해자 측은 정부 발표에 분노하며 법적 대응에 돌입할 방침이다. 강제징용 생존자들과 일부 유족,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 및 단체는 정부의 변제안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피해자들은 줄곧 전범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단대로 일본 전범기업인 일본제철과 미쓰미시중공업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해왔지만, 결국 정부는 이들의 배상 책임을 한국 기업에 전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부는 대법원 확정판결 원고들을 일일이 만나 동의를 구한 뒤 배상금 강제집행 사건을 심리 중인 법원에 돈을 공탁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총 15명으로, 이들이 받아야 할 판결금은 지연이자를 합쳐 약 40억원 규모다. 

피해자 측이 정부 결정의 위법성을 지적하고 있는 만큼 대법원이 변제안의 적법성을 따져보는 과정이 불가피 할 전망이다. 3자 변제 방식을 둘러싼 법적 해석이 분분해 법적 공방이 장기화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결국 가해자는 빠진 채 피해자와 피해 당사국 정부 간 갈등과 충돌, 사회적 진통이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되는 셈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3월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진 외교부 장관이 3월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日 호응' 촉구한 정부…피해자 "윤석열 물러가라" 

상대적으로 일본 정부는 느긋해졌다. 일본 기업의 직접 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며 대법원 판결 집행에 난색을 표하고, 이번 해법안 도출 과정에서도 전범기업 참여를 극구 거부해 온 일본으로서는 한국 정부가 구원투수가 됐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전날 강제징용 해법안을 발표하며 "물컵에 비유하면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지만 일본 정부나 기업의 가시적인 호응이 뒤따를지는 미지수다. 

일본의 후속 반응을 고려하면 협상 주도권을 한국 정부가 쥐었다는 정부 주장도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양국 현안이었던 수출규제 등 외교적으로 얽힌 사안이 일부 해소될 조짐이 있긴 하지만, 결국 일본이 원하던 그림을 한국 정부가 그려준 모양새가 됐다.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윤석열 정부를 강력 규탄했다. 양 할머니는 611개 단체로 구성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의 긴급시국 선언문 발표 기자회견장에 참석해 "아흔다섯 먹고 (이렇게) 억울한 적은 처음"이라며 "윤석열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 하루속히 물러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다른 생존 피해자인 김성주 할머니도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다 사죄를 받으라고 요구하나"며 정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성토했다.

피해자 측과 시민단체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조성할 '미래청년기금'에 대해서도 "미래 세대를 식민화하려는 음모"라며 "장학기금 조성이 한반도 불법 강점, 강제 동원 피해자의 고통 치유와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고 맹비난했다. 

각계에서 변제안을 두고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도 우려를 표했다. 송 위원장은 성명을 내고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는 단순히 금전적인 채권·채무가 아닌, 인권침해 사실 인정과 사과를 통한 피해자의 인간 존엄성 회복과 관련한 문제"라며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가 없는 채로, 더군다나 제3자 변제의 방식으로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