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걷는 재계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8 11:05
  • 호수 174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J․현대차․효성 등 복합위기 상황에도 공격적 투자
삼중 파도 넘어설 비장의 무기 마련 안간힘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삼중 파도에 더해 무역적자까지 12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전망한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6%. 세계 평균에 한참 못 미친다. 그래서일까. 초유의 복합 경제위기를 맞은 재계는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다. 당장 ‘돈줄 죄기’에 나섰다. SK하이닉스는 올해 투자 규모를 50% 가까이 줄였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설비투자 규모를 1조원 이상 축소했다. 한화솔루션의 경우 1600억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철회하기도 했다. “지금은 투자보다 위기 대응에 더 집중할 때”라는 게 재계의 한결같은 시각이다.

ⓒ뉴시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1월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현대차·기아 기술연구소 대강당에서 신년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선택과 집중 통해 위기 극복

절박한 분위기는 주요 그룹 총수들의 발언에서도 묻어난다. 기업 데이터 연구소 CEO스코어는 최근 국내 10대 그룹 총수들의 신년사에 언급된 키워드를 조사했다. 이 중에서 ‘위기’는 29회로 전체 4위에 올랐다. 2021년과 2022에 10위권에도 들지 않았던 키워드였다. 그만큼 재계 총수들이 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 해도 미래 먹거리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투자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CJ그룹이 대표적이다. 그룹 지주사인 CJ(주)의 지난해 연결 매출과 영업이익은 40조9249억원과 2조1542억원이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8.7%, 14.5% 증가했다. 주력 계열사인 CJ제일제당의 식품사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인 결과였다. M&A에도 적극적이다. CJ제일제당은 2019년 미국 냉동식품기업 슈완스를 2조8000억원에 인수했다. 그 성과가 지난해부터 나오고 있다. CJ제일제당의 해외 매출 5조원 중에서 슈완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달한다.

CJ그룹은 여세를 몰아 2026년까지 20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이재현 회장은 “2023~25년은 글로벌 플레이어로 가느냐, 국내에 안주해 쇠퇴의 길을 가느냐의 중차대한 길림길”이라고까지 말했다. 화이트 바이오(White BIO·친환경 바이오 소재)가 현재 CJ그룹이 공을 들이는 분야 중 하나다. CJ제일제당은 최근 PHA(해양 생분해)와 PLA(산업 생분해)를 섞은 컴파운딩 소재로 화장품 용기를 개발했고, CJ 올리브영의 자체 브랜드인 ‘쉐이크메이크’에 이 용기를 적용했다. 현재 유한킴벌리와 호텔 체인 아코르(ACCOR), 메이크업 브랜드 바닐라코(BANILACO) 등 글로벌 기업과 함께 생분해 소재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이런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5월 인도네시아 파수루안에 PHA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했다. 올해 1월부터는 합작 법인인 CJ HDC 비오솔을 통해 생분해 소재 컴파운딩 공장을 충북 진천에 건설 중이다. 향후 화장품 용기나 생활용품 포장재뿐 아니라 자동차 부품 소재 등으로 범위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최은석 CJ제일제당 대표는 “탄소중립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라면서 “CJ제일제당과 HDC 현대 EP가 협력해 친환경 소재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비오솔의 우수한 제조 역량을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된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CJ제일제당 독립법인인 CJ바이오사이언스를 통해 진행 중인 레드 바이오(Red Bio·제약 및 헬스케어) 사업도 성과를 내고 있다. CJ바이오사이언스는 글로벌 수준의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신약을 개발하는 회사다. 지난해 말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마이크로바이옴 면역항암치료제 CJRB-101의 1상과 2상 임상시험 계획서를 승인받았다. 신청 시점으로부터 1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향후 임상을 비롯한 연구개발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위해 CJ바이오사이언스는 2021년 10월 마이크로바이옴 전문기업 ‘천랩’을 인수한 상태다. 회사 관계자는 “CJRB-101의 핵심 타깃 질환인 폐암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발병률과 사망률이 높다”면서 “미국과 함께 국내 식약처에도 임상시험 계획서를 제출,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항암치료제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판매 확대를 통해 삼중 파도를 넘어선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현대자동차 역시 역대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아이오닉5와 GV60 등 전기차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선전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대차의 전기차 글로벌 판매량은 20만9000대. 전년 대비 48.2%나 증가했다.

정의선 회장의 ‘퍼스트 무버’ 전략이 주효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이전까지 현대차그룹은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펼쳐왔다. 브랜드 가치 면에서 벤츠나 BMW, 아우디 등 선발주자에 밀렸기 때문이다. 전기차 시대는 달랐다. 모든 업체가 동일한 출발선에 서있다. 뛰어난 성능과 가치로 경쟁업체를 제칠 수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 최초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개발했다. 덕분에 유럽에서 현대차그룹은 벤츠, BMW, 아우디 등 쟁쟁한 회사를 제치고 전기차 판매 4위를 기록했다. 미국의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196.2%에 달한다. 그룹 관계자는 “미국산 전기차를 우대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신차 수요 감소가 올해 극복해야 할 문제다”면서 “현재 5%도 안 되는 리스 비중을 30% 이상으로 확대해 위기를 헤쳐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효성그룹의 위기 극복 방안은 혁신적인 소재로 신시장을 개척하는 것이다. 효성티앤씨와 효성첨단소재, 효성화학 등이 현재 축적된 기술력과 시장 점유율을 바탕으로 시장을 확장 중이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은 “소재 분야에서의 강점과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해 위기 극복과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는 오너 경영 체제로 회귀하기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경영인은 오너의 리더십을 보완하는 역할로 인식됐다. 적극적인 투자나 신사업 발굴보다 안정적인 관리에 머물러 있던 게 사실이었다. 2021년 미래에셋의 최현만 부회장과 삼성전자의 김기남 부회장이 회장에 올랐다. 풀무원의 경우 오너 일가인 남승우 전 사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오너 2세가 아니라 이 회사 ‘사원 1호’인 이효율 대표에게 경영을 맡기기도 했다. “자녀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덕분에 풀무원은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17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이 같은 분위기가 최근 바뀌고 있다. 대내외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오너 경영 체제로 회귀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오너 경영 체제로 회귀하면서 내세우는 구호는 하나같이 ‘책임경영’이다.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 업계 1위 교촌치킨을 운영하는 교촌에프앤비는 지난해 말 전문경영인이었던 소진세 회장이 물러나고 권원강 창업자가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농심 계열사인 메가마트도 지난해 7월 전문경영인 체제를 접고 23년 만에 오너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HD현대그룹(옛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우 권오갑 회장 대신 대주주인 정몽준 현대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 정기선 사장이 조만간 경영권을 넘겨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