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었다 뒤통수? 尹-MB ‘대일외교’ 평행이론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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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MB-2023년 尹 모두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자”
日, 韓정부 기대 달리 ‘언론 플레이‧역사 왜곡’ 논란 반복

“일본에 맨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

2008년 4월20일,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방미 일정을 마치고 일본 도쿄에 도착해 “(한‧일) 경제협력을 실질적으로 더 강화하려고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또 “과거사에 얽매여 일본과 소원하게만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한‧일 관계를 실용적 관점에서 재정립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구상과 달리 한‧일 관계는 이후에도 평행선을 달렸다.

그로부터 15년 뒤, 윤석열 대통령이 꼬인 한‧일 관계 매듭을 풀겠다고 나섰다. 한국 정부의 ‘통 큰 양보’를 앞세운 이른바 ‘그랜드 바겐’(일괄 타결)을 통해 한‧일 경제협력의 물꼬를 트겠다는 각오다. 그러나 ‘친일 논란’을 무릅썼던 이 전 대통령도 일본의 전향적 자세를 끝내 이끌어내지 못했다. 과연 윤 대통령은 MB와 달리 난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8년 1월1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8년 1월1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미래 보자”…MB와 닮은 尹정부 대일외교

여권 일각에선 윤 대통령의 노선이 ‘MB 닮은꼴’이란 해석이 나온다. 특히 ‘모든 책임은 리더가 진다’는 자세, ‘이념보다는 실용’이라는 신념이 닮았다는 전언이다. MB와 윤 대통령 모두를 보좌했던 한 여권 인사는 “두 사람 모두 전통 정치인이 아니다보니 소위 말하는 ‘여의도 문법’으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며 “강한 리더십을 앞세워 경제‧외교 문제를 빠르게 풀겠다는 생각이 닮았다”고 평가했다.

실제 윤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MB와 유사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한‧일 관계 개선을 정부의 선결 과제로 내세웠다. 이에 윤 대통령과 MB 모두 취임과 동시에 일본 정상을 찾아 ‘한‧일 관계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자’고 다짐했다.

2008년 4월21일, 이 전 대통령은 후쿠다 야스오 당시 총리와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관계는 과거 역사를 우리가 항상 기억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나아가는데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은 ‘독도나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경우 새로운 한‧일관계가 어려울 수 있다’는 질문에 “어느 나라든지 정치는 각자 의견을 다 이야기할 수 있다.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윤 대통령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가진 후 ‘MB 대일관’을 계승한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친일 외교’ 논란을 의식한 듯 “일본은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두 대통령의 선언에 일본 정부 역시 화답하는 듯 했다. 일본 정부는 이 전 대통령에게 ▲취업관광사증제도 확대 ▲한·일 대학생 교류사업 개시 ▲한·일 신시대 공동 연구 프로젝트 개시를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 성과로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불화수소·불화 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 해제 ▲양국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백색국가) 복원 등을 내세웠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친교의 시간을 함께하며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친교의 시간을 함께하며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일본? “한국만 양보해선 갈등 해결 안 돼”

이 전 대통령은 자신과 닮은 윤 대통령의 대일외교에 큰 만족감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지난 15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예방을 받은 이 전 대통령은 윤 대통령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 결정을 두고 “과감한 제안”이라고 호평했다고 한다.

재계에서도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심윤조 한‧일친선협회중앙회 부회장은 “한‧일 관계 정상화를 통해 양국 국민 모두에게 안보,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관광 등의 측면에서도 많은 혜택이 돌아가고 상호 국민 감정도 점차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또한 한‧일 협력은 한·미·일 3국의 경제안보협력 강화로 이어져 우리가 글로벌 중추국가 역할을 수행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정치권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윤 대통령의 대일 외교를 칭찬한 이 전 대통령조차 대일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탓이다. 이 전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 후 쏟아진 일본 언론의 ‘정부발(發) 보도’ 탓에 ‘굴욕 외교’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2008년 7월13일, 교도통신이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중학교 해설서 독도명기 방침을 전했다’고 보도하자,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우향우’가 계속되면서 MB 정부는 코너에 몰렸다. 일본 주요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독도‧강제징용 문제 관련 망언들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는 ‘밀실 추진’이라는 여론의 비판에 직면해 이를 포기했다. 결국 ‘민심’은 악화됐고, 2012년 8월10일 이 전 대통령은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임기 초 대일 외교 노선을 임기 말 막판에 수정한 셈이다.

윤 대통령 역시 유사한 상황에 처한 모습이다. ‘그랜드 바겐’을 공언했지만 일본 정부가 빠르게 화답하지 않으면서다. 되레 일본 정부는 28일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는 내용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일본의 ‘성의있는 호응’을 기대했던 윤석열 정부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일한의원연맹 누카가 후쿠시로 회장이 지난 17일 방일 중인 윤 대통령에게 일본산 멍게 수입 재개를 요청할 당시 대통령실 관계자가 일본 측의 동영상 촬영을 제지했다’고 보도하며 논란에 불을 붙였다. 대통령실이 “사실 무근”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정치권에선 ‘한‧일 정상회담→역사 왜곡 논란 재발화→민심 악화’라는 악순환에 빠졌던 MB 정부의 전철을 윤 대통령이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일본은 경제‧군사와 역사를 분리해 대응하는 ‘투 트랙’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만 ‘한 번에 해결하자’고 서두르는 모습”이라며 “독도‧교과서 왜곡 문제 등에서 일본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본처럼) ‘투 트랙’으로 협상에 임하면 된다. ‘우리가 먼저 크게 양보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자세로는 (한‧일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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