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어떻게 ‘먹히는’ 소재로 자리 잡았나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22 13:05
  • 호수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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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영화·다큐까지…스포츠 콘텐츠 전성시대

스포츠가 콘텐츠의 중요 소재로 자리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영화, 다큐멘터리까지 스포츠 소재 콘텐츠들의 선전이 눈에 띈다. 어찌 보면 스포츠 중계보다 더 잘나가는 스포츠 콘텐츠의 전성시대. 무엇이 이런 흐름을 만든 걸까. 

스포츠 중계보다 스포츠 콘텐츠가 더 재밌다? 어찌 보면 잘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이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씨름의 희열》(2019)이다. 호시절이 다 지나간 씨름이라는 스포츠에, 오디션 서바이벌 같은 형식을 더함으로써 씨름의 매력을 다시금 시청자들에게 전했던 예능 프로그램이다. 선수들은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진 매력적인 인물로 모래판에 올랐고, 순식간에 승패가 나버리던 경기는 슬로모션으로 세세하게 포착해 내는 카메라를 통해 그 경이로운 기술들이 소개됐다. 시청자들은 프로그램 제목처럼 씨름이라는 스포츠가 주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스포츠 중계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경기장 바깥의 이야기나, 경기 깊숙이 들어간 이야기들을 방송은 잡아낼 수 있는 여력이 충분했다. 이 프로그램을 기점으로 씨름은 《씨름의 여왕》 《씨름의 제왕》 《천하제일장사》 등 다양한 형태의 스포츠 예능으로 다뤄졌다.

영화 《카운트》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중꺾마’와 ‘졌잘싸’ 정서로 붐업 

코로나 팬데믹 때도 스포츠 예능은 비대면으로 인해 관객이 사라지며 시들해진 스포츠 중계의 빈자리를 톡톡히 채워줬다. 《뭉쳐야 찬다》가 레전드 스포츠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실전 축구를 보여줬고 스핀오프 프로그램 《뭉쳐야 쏜다》로 농구의 묘미를 전해 줬다. 《골 때리는 그녀들》은 지금껏 단체 스포츠에서 소외돼 있던 여성들을 축구의 세계로 이끌었고, 비대면의 답답함을 뚫고 대중화된 골프 바람을 타고 《편먹고 072》 《골프왕》 《버디 보이즈》 같은 골프 예능이 쏟아져 나왔다. 코로나19 이전에도 또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스포츠는 점점 콘텐츠의 중심 소재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져 《순정파이터》 같은 이종격투기나 《최강야구》 같은 야구, 《강철볼》 같은 피구까지 스포츠의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스포츠 콘텐츠가 스포츠 중계와 다른 점은 ‘과정’에 좀 더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실시간 방송되는 스포츠 중계 역시 과정은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목되는 건 승부의 결과다. 월드컵 같은 경기에서 몇 대 몇의 결과로 예선에 올랐는가 하는 점은 다음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좌우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래서 이길 가능성이 큰 경기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재밌고 또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스포츠 콘텐츠들은 알려준다. 이른바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같은 정서가 생겨나는 건 결과만이 아닌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대중의 변화를 보여준다. 올 상반기 침체됐던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 건 바로 이 ‘중꺾마’ 정서였다. 저마다 약점들을 가진 선수들이 그걸 하나하나 극복해냄으로써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이 작품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주)NEW 제공

공정과 기회에 대한 판타지로 호응 이끌어 

‘중꺾마’와 더불어 대중이 승패의 세계에서 새롭게 보고 있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정서 역시 마찬가지로 과정을 중요하게 바라본다. 저마다의 피지컬을 자랑하는 100명의 출연자가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피지컬: 100》이 주목한 것 역시 ‘졌잘싸’였다. 결국엔 승패가 갈리는 미션들을 치렀지만, 경기에서 이긴 선수들만이 아니라 진 선수들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쏟아냈다. 승패는 나뉘었지만 좋은 경기를 보여준 것만으로 이들은 모두 승자였다. 이처럼 스포츠 콘텐츠는 그간 실시간으로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스포츠 중계가 포착하지 못하는 과정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봄으로써 그 안에 담긴 ‘중꺾마’나 ‘졌잘싸’ 같은 가치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영화 《리바운드》 포스터 ⓒ(주)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스포츠 콘텐츠는 현실에 부재한 결핍을 채워주는 판타지 역할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 같은 영화가 그렇다. 《리바운드》는 2012년 전국고교농구대회에서 부산중앙고가 예선 이후 단 5명의 선수로 교체선수 없이 결승까지 오르는 기적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결국 최고 농구 명문인 용산고를 결승에서 맞아 63대89로 져 준우승에 그쳤지만, 교체선수 없이 불굴의 투지로 끝까지 뛴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장항준 감독이 이 실화에서 주목한 것은 공정과 기회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명문고가 기량 있는 선수들을 싹쓸이함으로써 부산중앙고 같은, 전통은 있지만 선수층이 얇을 수밖에 없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그래서 지원도 줄어드는 악순환을 겪는 일들은 지금도 스포츠계에서는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이런 양극화된 모습은 우리 현실 그대로다. 청춘들에게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가 미래를 결정하기도 하는 현실은, 저 농구계가 그러한 것처럼 결코 공정하다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굳이 장항준 감독이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리바운드》라는 제목을 붙인 건, ‘다시 도전할 기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더 많은 도전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이 건강한 사회와 미래를 만들 거라고 장항준 감독은 농구를 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포츠도 역시 어떤 학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는 불공정함이 존재하지만, 부산중앙고의 실화가 보여주듯이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낼 수도 있는 판타지가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포츠 콘텐츠가 끄집어내는 공정과 기회에 대한 판타지는 현실 대중의 갈증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큐멘터리 《아워게임》의 한 장면 ⓒ
다큐멘터리 《아워게임》의 한 장면 ⓒTVING 제공

최근 티빙에서 방영되고 있는 《아워게임: LG트윈스》(이하 《아워게임》) 같은 다큐멘터리에도 이러한 정서적 지점들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2022년 28년 만의 우승을 노리는 LG 트윈스의 1년을 담았는데, 아쉽게도 LG 트윈스는 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에서 1승3패로 탈락한 것. 그것도 이길 것처럼 보이던 경기가 한순간에 흐름이 바뀌면서 지게 된 상황들이 이어졌다. 팬들로서는 결코 복기하고 싶지 않은 경기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워게임》은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는 경기들을 하나하나 따라가 왜 그런 결과들이 나왔고, 그 과정에 숨겨져 있던 숨은 노력과 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우승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또다시 다음 경기와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승패로 환희와 좌절을 오가지만,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대중에게 위안을 준다. 때론 불공정한 세계에서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또 다른 기회를 향해 나간다는 걸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고 있어서다. 

스포츠는 이처럼 예능부터 영화, 다큐멘터리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에는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고픈 욕망과 더불어 공정과 기회 같은 대중의 갈증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것이 스포츠 콘텐츠 전성시대에 드리운 현실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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