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현실에 맞서는 우정과 연대 《토리와 로키타》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06 16:05
  • 호수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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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벨기에의 형제 감독 장 피에르와 뤽 다르덴의 신작 《토리와 로키타》는 유럽에 당도한 아프리카계 이민자 아이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 그럼에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우정이 담긴 영화다. 다르덴 형제는 1980년대부터 벨기에 산업지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극영화로 분야를 넓혀 신자유주의 체제 속 열악한 노동자 환경과 도덕적 딜레마에 주목해온 형제의 시선은, 최근으로 올수록 이민자들에게 좀 더 깊숙이 향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며 75주년 기념작 수상의 영예를 안은 이 작품은 올해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해 일정을 마친 다르덴 형제 감독의 신작 리뷰와, 쉽게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항하는 영화를 만드는 고된 작업이 “아직까지는 지치지 않는다”고 힘주어 답변한 그들과의 대화를 전한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착취당하는 이민자의 실체를 고발하다

《프로메제》(1996)의 소년은 홀로 윤리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계 이민자를 불공정하게 착취했고, 나아가 그의 죽음을 묵인하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이민 노동자가 죽기 전 나눈 약속을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되새겨보고 있다. 그건 그가 살아가야 할 비정한 세계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최소한의 인간성이자 양심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다르덴 형제 감독은 그들의 첫 장편 극영화 연출작이었던 《프로메제》와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영화들을 만든다. 사회적 문제에 기반한 드라마, 카메라에 저항하는 듯한 인물의 사실적 움직임을 담은 간결한 스타일은 한층 더 견고해졌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서유럽 사회의 이민자 문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은 현지인들의 딜레마로부터 이민자 자체의 삶으로 조금 더 가까이 옮겨간 인상 역시 있다.

주인공은 아프리카계 이민자 청소년인 열한 살 토리(파블로 실스)와 열여섯 살 로키타(졸리 음분두)다. 각각 베냉과 카메룬을 탈출해 벨기에로 온 이들은 함께 생활하며 서로를 돌보고 있다. 남매로 위장하고 있는 것은 체류증을 받아 정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그보다 선의를 바탕으로 한 우정에 더욱 기반한다. 하지만 사회가 냉엄하게 판단 내린 이들의 처지는 체류증을 받지 못한 미등록 난민일 뿐이다.

동네 피자 가게에서 일하는 이들의 진짜 업무는 피자 박스에 숨긴 마약 배달이다. 겨우 손에 쥔 몇 푼의 돈마저 이들을 벨기에로 데려온 밀입국 브로커들이 갈취하거나 아프리카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다. 이중 삼중의 착취가 일어나는 사이, 로키타는 불법 체류증이라도 구하기 위해 외딴 공장에 갇혀 대마초 재배를 도맡는다. 로티카를 만나고 싶은 토리의 순수한 우정은 그를 그곳에 데려다 놓지만, 그 결과는 비인간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의 발생이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토리와 로키타》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토리와 로키타》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토리와 로키타》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토리와 로키타》의 카메라가 고발하는 것은 이민 노동자들을 이용하는 신자유주의 시장의 폭력적 본질이다. 착취 구조 위에 세워진 불법적 산업 경제, 최소한의 인간성이 말살돼 가는 과정 안에서 이민자와 미성년이라는 이중의 한계를 지닌 인물들은 가장 먼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여성인 로키타는 성폭력에도 쉽게 노출된다. 《언노운 걸》(2017)에서 병원 문을 두드리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던 흑인 소녀는, 《토리와 로키타》에 이르러 로키타라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이름을 얻는다. 전작이 유럽 사회 이민자 문제에 일말의 죄책감을 안은 인물의 행보였다면,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에서 이민자를 분명한 ‘실체’로 대하고 있다.

난민인 토리와 로키타의 정체는 미디어와 정치 논리를 통해 부각되는 것처럼 사회 질서를 해치거나 범죄의 가해자가 되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가장 취약한 그늘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피해자들이다. 영화는 난민의 추상적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허가증을 얻기 위해 불법 산업에 노출되는 현실을 제시하며 이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적 처우가 무엇인지 역으로 짐작하게 만든다. 캐릭터에 직접적으로 동일시되는 것을 피하고 냉엄하게 사건의 파장을 지켜보도록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는, 손쉬운 동정심을 유발하는 대신 사회의 냉소를 고발한다.

영화는 비록 비정한 사건들을 다루지만, 핵심 동력은 분명 토리와 로키타의 친밀한 우정에서 나온다. 구원은 결코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인간이 자신과 타인에게 가지며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말한다. 타인을 향한 우정과 연대는 여전히 가능한가. 그것은 왜 필요하고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토리와 로키타의 반짝이는 까만 눈이 묻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장 피에르 & 뤽 다르덴 인터뷰

“관객들이 조금은 분노하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영화의 엔딩을 묘사하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약 등 각종 범죄에 이용당하는 난민 아이들의 기사를 읽은 것이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보호자 없는 미성년 이민자의 상당수가 행방불명된다는 기사였다. 성인이 되기 전 정식 서류를 받을 수 없다는 위기감은 이들을 더 많은 위험을 무릅쓰는 불법적 산업으로 내몬다. 대다수는 마약이나 성매매 문제에 가담하게 된다. 극 중 로키타가 대마초를 재배하는 폐쇄 공장에 갇히게 되는데, 이는 벨기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기반으로 했다. 벨기에에 총 여섯 군데의 대마초 공장이 있었고, 스무 명이 넘는 연루 범죄자가 체포된 사건이다.”

주인공으로 장년층이 등장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세대’로 시각이 향하기 때문일까.

“다루고 싶은 사건에 맞게 연령대를 설정하려 한다. 예를 들어 《프로메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렸는데, 부정한 아버지를 힘겹게 벗어나려는 아들의 투쟁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토리와 로키타》에서는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유럽에 온 이민자, 그중에서도 미성년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유럽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기 때문이다. 난민보호소 직원 등 이들에게 호의적인 일부 어른도 있지만, 이들의 상황을 이용해 착취하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가운데 두 아이가 우정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로키타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데.

“충격을 받은 관객이 많을 것으로 안다. 결말을 놓고 고민이 많았지만,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아이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다른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통해 불공정한 세상을 고발하고 싶었고, 용인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로키타의 죽음은 끝까지 토리를 보호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이들의 우정을 보면서,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상황에 관객들이 조금은 분노하길 바란다. 로키타는 사라졌지만 이들이 보여준 불굴의 우정은 끝까지 남는다. 토리 역시 이 희생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토리가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성인이 되어 가정도 꾸리는 행복한 미래가 있기를 바라며 영화를 마무리했다.”

토리와 로키타를 연기한 두 사람은 이전에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비전문 배우들이다.

“처음부터 비전문 배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 다만 벨기에에서 해당 나이대 배우를 찾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다. 오디션에서 파블로와 졸리의 목소리와 느낌, 그들의 연기를 보고 함께 일하기로 정했을 때 그들이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뿐이다. 이는 분명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선택이 옳았는지는 촬영 첫날 비로소 알 수 있다(*이들은 촬영 전 5주간의 리허설을 가졌다). 다행히 이번 영화는 어린 두 배우가 탄생하는 것을 즐겁게 목격하는 과정이었다. 관객들에게도 똑같은 즐거움이 전해진다면 좋겠다.”

극영화가 추구하는 리얼리즘 다큐멘터리는 달라야 한다. 단순히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과도 달라야 하는데.

“인물을 전형적으로 그리는 대신, 실제로 살아가는 인간처럼 그리려 노력한다. 카메라가 마치 그 삶의 현재에 잠시 다녀가고, 카메라는 빠지지만 여전히 인물의 삶이 지속된다는 느낌을 주려 한다. 기술적으로는 카메라와 조명을 극대화해 ‘이곳에서 이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는 단서를 미리 주는 방식 대신 예측이 불가능한 방식을 선호한다. 이는 우리가 삶에 저항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보여줄 것보다 숨길 것에 대해 먼저 고민하고, 마치 카메라가 한 명의 증인처럼 중립적인 시각에서 인물들을 찍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영화는 현실을 부지런히 고발하지만 저소득 노동자 계층의 노동 문제와 윤리적 딜레마, 이민자들이 겪는 소외와 학대 등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자주 생각하진 않나.

“다행히 아직까지는 지치지 않았다(웃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영화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기 위해 만드는 선동 영화. 이건 불행한 방식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지향하는 것으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의 영화다. 그 대화는 극 중 인물들의 것일 수도 있고 관객 스스로의 것일 수도 있다. 때론 지금까지 믿고 있던 것들을 흔들고 혼란을 주는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관객들이 《자전거 탄 소년》(2012)에서 소년을 믿어준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가 되기를, 《토리와 로티카》의 토리와 로키타가 되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든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인물에 대해 눈을 뜨고 대화를 시작했으면 한다.”

한국을 포함해 난민 문제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가도 아직 많은데.

“난민이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떠나 매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들은 우리처럼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평범한 인간이며, 우리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다. 영화를 통해 이 메시지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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