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파이터”...데뷔 3년 만에 복싱 한국챔피언 된 ‘소아과 의사’
  • 김현지 기자 (metaxy@sisajournal.com)
  • 승인 2023.07.22 12:05
  • 호수 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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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려경 순천향대 부속 천안병원 교수 “장난으로 친 펀치에 친구 날아가”
병원과 복싱이 전부인 날들…경량급 경기에서 드문 KO승도 거두며 무패 행진

프로복싱 경량급에서는 KO(Knockout) 승리가 드물다고 한다. 상대가 쓰러진 후 10초 안에 경기를 시작하지 못할 정도의 KO 승리도, 무패 행진을 이어가는 일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여성 복싱 경량급 경기에서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무패 행진의 선수가 TKO 승리로 한국챔피언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TKO(Technical Knockout)는 심판 재량하에 경기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선언된다. 상대가 무너진 것은 8라운드, 38초 만의 일이다. 챔피언이 된 이 선수의 기록은 통산 전적 7전 6승(4KO) 1무.

예상치 못한 반전은 또 있다. 이 선수의 본업, ‘본캐(본캐릭터의 줄임말)’는 의사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아기들을 돌보는 소아청소년과 소속이다. 하루의 반은 아기를 환자로 맞이하고, 반은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그 주인공은 순천향대학교 부속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서려경 교수(30)다. 이제 그의 이력에는 ‘프로복싱 KBM 여자 라이트플라이급 한국챔피언’이 더해졌다. 서 교수는 7월14일 서울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린 ‘KBM 3대 한국타이틀매치’에서 승리, 프로무대 데뷔 3년 만에 한국챔피언에 등극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주량 소주 2병…경기 잡히면 당연히 단주”

경기는 끝났지만 열기는 식지 않았다. 서려경 교수의 두 손등 위에는 붉은 흉터와 자국이 여전히 선명하다. 세간의 관심도 남다르다. 서 교수의 일터인 병원 앞에는 그를 알아보는 지역 인사들이 잇따랐다. 7월19일 오후 충청남도 천안시 인근에서 시사저널이 만난 서 교수의 얼굴에는 어색함과 웃음기가 공존했다.

서려경 교수가 복싱을 처음 시작한 때는 2018년 말이다. 프로무대 데뷔는 이로부터 2년여 뒤인 2020년이다. 서 교수는 평소 운동을 좋아했다. 그런데도 복싱을 선택한 시작점은 ‘술’이었다. 그는 의대생 시절 술을 좋아했다. ‘동기 중에서 술 좋아하는 애’라고 불렸다. 주량은 소주 2병 이상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술을 잘 마시고 좋아했다고 한다. 서 교수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 주변에는 놀 것도 할 것도 없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동기들과 쉬는 날이면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게 일상이 됐다.

마취통증의학과 선배와 술을 마신 날이었다. 복싱을 하던 선배였다. 선배는 서 교수에게 ‘잘할 것 같다’며 복싱을 추천했다. 서 교수는 흔쾌히 체육관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에 하지 못한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격투기나 이런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공부하라고 안 보내줬다. 반면 오빠는 운동을 하도록 보내줬다. 어머니는 지금 내가 복싱을 하는 것도 싫어하신다. 10대 때는 시키는 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이제 30세이니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다. 복싱이 나를 살리기도 했다. 복싱 경기가 잡히면 술을 당연히 안 마신다. 술을 끊을 방도가 없었는데….”

운동으로 시작한 복싱인데 이제는 프로선수가 됐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 체육관 관장이 서려경 교수의 재능을 알아봤다. 다만 서 교수가 의사이기 때문에 선수를 하라고는 처음부터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서 교수는 “만약 다른 관장님이었으면 챔피언까지 못 했을 것 같다”며 “그는 한국챔피언 출신으로 여러 선수를 키운 지도자로서 내게도 조언을 많이 해줬다”고 감사함을 드러냈다.

서려경 교수의 남다른 힘에 얽힌 일화도 있다. 서 교수의 ‘펀치 한 방’에 친한 친구가 날아간 적도 있다. 다음은 서 교수의 이야기다. “20대 시절 일이다. 친한 친구와 놀다가 장난을 한다며 밀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날아갔다. 체구가 작은 조그마한 여자 친구이긴 했어도, 그 친구가 날아가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남자 친구들도 쉽게 나를 못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다(웃음). 이번 경기에서 레프트훅으로 케이오(KO)시켰다. 평소 천 개, 만 개 주먹을 내면서 연습해야 나오는 건데, 또 펀치력도 타고난 게 아닐까 싶다.”

한국챔피언 타이틀 소식 이후 서려경 교수의 근성도 알려졌다. 육체적으로 힘든 의사 생활과 복싱 연습을 꾸준히 했다는 사실이다. 친구들은 서 교수의 기량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한국챔피언 소식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서 교수에게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응원 섞인 용기의 말도 건넸다.

ⓒ서려경 교수 제공
2021년 12월 경기에서 KO승을 거둔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려경 교수 ⓒ서려경 교수 제공

글러브 끼면 달라지는 눈빛

물론 불편한 시선도 있다. 서려경 교수는 한국챔피언이 되기까지 우려 섞인 목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잘했지만, 지고 그만 좀 하지”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서 교수는 “전혀 아니었다”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 주먹을 안 맞아보지 않았나”라며 “내가 운동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포기를 말했던 이들에게서 최근에는 응원의 메시지도 많이 받고 있다.

혼자 버텨내야 할 고비는 지난해 찾아왔다. 서울에서 전임의(펠로·전문의로 세부전공을 위해 대형 병원에 있는 의사)로 지냈던 때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내며 운동도 했다. 서려경 교수는 말 그대로 “울면서 했다”고 회상했다. 다음은 서 교수의 설명이다. “몸이 녹아내리고 부서지고, 근육이 찢겨나가는 것 같고 온몸에 통증이 있었다. 펠로 생활을 하면서 경기한다는 건 힘들다고 예상했던 일이다. 그래서 기량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만 하자는 생각으로 운동했다.”

당시 하루 평균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운동했다. 새벽에 기상해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한 후 체육관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줄넘기를 하면서 몸을 풀고, 섀도 복싱-미트 트레이닝-샌드백 순으로 계속 운동을 한다. 서려경 교수는 바쁜 틈에도 일주일에 4번 정도 운동을 했다고 기억했다. 올해 자리를 옮긴 후부터는 매일 운동하고 있다.

서려경 교수에게 복싱은 이제 일상이 됐다. 그렇다고 마냥 재밌지는 않다고 한다. 복싱을 시작해 실력이 향상될 땐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가 돼 목표가 생긴 후부터는 ‘재미’로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 교수는 글러브를 끼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그는 자신의 복싱 스타일을 ‘인파이터’라고 소개했다. 인파이터는 일반적으로 상대에게 달라붙어 공격하는 유형의 선수를 의미한다. 7월14일 경기에서 서려경 교수의 스타일은 ‘아웃복서’였다.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유효 타격을 노렸다고 한다. 서 교수는 “운동을 많이 할수록 맞는 것도 느는 것 같다”며 “‘금강불괴(그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교용어. 몸이 금강석처럼 단단해지는 경지에 이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같아지는 느낌인데, 그래도 안 맞고 싶다(웃음)”고 말했다.

 

“다음 무대는 세계챔피언, 1~2년 내 끝낼 것”

‘복싱선수 선생님’은 병원에서 어떤 모습일까. 초년 시절에는 며칠 후 수술하기로 한 아기 환자의 수술을 앞당기라는 부모님의 항의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우는 아기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는다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건강해진 아기들을 볼 때면 행복한 표정을 짓는 젊은 의사다. 그는 현재 신생아 분과에서 일하고 있다. 서려경 교수는 의사로서 기억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kg도 채 안 되는 미숙아들이 있다. 이런 아기들은 외래로 계속 추적 관찰을 한다. 그러다 아장아장 걷거나 조금 큰 아기가 눈에 보이는 날이 있었다. 그때 어떤 어머니께서 ‘선생님, 이 아이가 그 ㅇㅇ이다’라며 인사를 건넸다. 진짜 조그맣던 아이가 이렇게 큰 모습을 보는 건데, 이럴 때 정말 뿌듯하다.”

데뷔 3년 만에 한국챔피언이 된 서려경 교수의 다음 무대는 세계다. 단, 1~2년 내 이를 완수하자는 것이 서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그동안 운동을 힘들게 하면서 노력해 얻은 결과라 너무 기쁘고 뿌듯하다”며 “당분간은 지친 몸과 마음을 조금 쉬게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면 추진력도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동안 서 교수의 시간은 병원과 체육관이 전부였다.

“이후에는 세계타이틀도 거머쥐고 싶다. 다음 경기 전까지 복싱 실력을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1~2년 안에 끝내야 한다. 할머니가 돼도 체육관 가서 운동하고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선수로서 생활하는 것은 죽겠다. 오래 하려야 할 수 없다. 당장 예정된 세계무대는 없다. 하지만 빨리 잡으면 올해 말 가능하지 않을까. 다음에는 세계챔피언이 돼 인터뷰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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