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무필(毋必), 대통령의 언어사용법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oxen7351@naver.com)
  • 승인 2023.07.28 17:05
  • 호수 176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어》에는 공자의 언행을 묘사하는 언급이 종종 나온다. 예를 들어 공자의 성품에 대해 온량공검(溫良恭儉)했다고 말하고 있다. 낯빛은 온화했고 마음은 선량했으며 몸가짐은 공손했고 매사 검소했다는 뜻이다.

또 공자는 제자들에게 문행충신(文行忠信) 네 가지를 가르쳤다고 묘사하고 있다. 문(文)이란 애쓰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문(人文)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려고 애쓴다는 뜻이 된다. 행(行)이란 도덕적 행실이 아니라 행사(行事), 즉 일을 행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자는 민어사(敏於事), 즉 일을 할 때는 명민하게, 주도면밀하게 해야 함을 강조한다. 

공자는 네 가지를 끊었다고 했다. 억측하지 않았고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하지 않았고[毋必] 고집을 세우지 않았고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공자는 군왕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다. 늘 군왕의 덕을 자기 몸에 갖추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이 네 가지는 공자가 지향했던 수양 목표이며, 리더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모두 목표로 삼아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중 무필(毋必)은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과 연결되어 있다. 공자가 말하는 천명은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일의 형세[事勢]를 말한다. 공자가 50세에 천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 운명을 알게 되었다는 말도 되겠지만 비로소 일의 형세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이보다 좀 낮은 단계가 일의 이치를 아는 불혹(不惑)이다. 일의 이치를 아는 것과 일의 형세를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공자는 40세에 불혹했고 50세에 지천명했다고 말했다.

공자 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군신(君臣) 관계를 끌어들여야 한다. 즉 일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은 신하 몫이고 일의 형세를 알아내는 것은 임금의 몫이다. 신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임금은 일을 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일을 시킬 때 하는 말을 그래서 명(命)이라고 한다. 명을 내리는 순간 비로소 일의 최초 형세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일의 이치란 대부분 정해진 것이라 바르게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 신하의 사사로운 욕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 바를 정(正)이다.

그러나 일의 형세는 매순간 달라진다. 매번 달라진 상황에 적중하는 것[中]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자는 “나에게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없고 반드시 이렇게 해서 안 된다는 것도 없고 그때마다의 마땅함을 따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무필(毋必)이다. 무필은 임금의 덕목이고 반대로 신하는 필(必)해야 한다.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국무회의에서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국무회의에서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취임 1년을 넘긴 윤석열 대통령의 말을 돌아보면 대부분 무필(毋必)보다는 필(必)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윤 대통령은 연설을 잘한다. 알기 쉽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대선 유세 때 가장 놀란 점도 그의 메시지 전달력이었다. 그러나 유세 때 연설과 대통령이 된 후 연설에서 달라져야 할 점은 바로 이 무필(毋必)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수해 때 대통령은 분명 “앞으로 기후이상은 일상화될 것이니 현 재난관리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말한 바 있다. 환경부에는 “국가하천, 지방하천, 지류 전반의 수위 모니터 시스템을 개발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지하차도 사고를 보면 이런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고 심지어 경찰들은 거짓 보고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이 아무리 “원점에서” “두 번 다시~없도록” “반드시” “결단코”  등의 레토릭을 쓴다고 해서 국민이 신뢰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말보다 실천이지만 그에 앞서 말도 신중해야 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br>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