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은 왜…‘이승만 농지개혁’을 다뤘을까 [최병천의 인사이트]
  •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7.31 10:05
  • 호수 176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의 농지개혁 보다 더 진보적
개혁에 대한 ‘냉전우파’와 ‘냉전좌파’ 해석 다 편향돼

7월15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대한상의가 주최하는 특별 강연을 했다. 제목은 ‘경제성장 이끄는 법무 행정과 기업의 역할’이었다. 한 장관의 강연은 총 40분 분량으로, 내용은 크게 두 단락이다. 앞부분 20분은 한국 경제사에서 ‘농지개혁’의 의미를 다룬다. 뒷부분 20분은 한 장관이 추진하고 있는 ‘이민정책’을 다룬다. 

한 장관은 농지개혁을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한국 정치인 중에서 경제성장과 농지개혁의 관계를 잘 정리한 대표 사례가 아닐까 싶다. 평소 필자 역시 여러 공간에서 경제성장과 농지개혁의 관계를 강조한 바 있다.

세계경제사에서 30년에 걸쳐, 1인당 GDP가 연평균 5.5% 이상 성장한 대표적인 국가는 한국, 대만, 중국, 일본이다. 4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①농지개혁 ②친미 성향 ③제조업 중시 ④지정학적으로 소련 혹은 공산주의와 국경을 접하는 최전선에 위치한 점 등이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당시 중국의 외교노선은 친미-반소 노선이었다. 

ⓒ뉴시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7월15일 제주도 서귀포시 해비치호텔앤리조트에서 열린 ‘제46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 참석해 ‘경제성장 이끄는 법무 행정과 기업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시스

농지개혁, ‘인센티브와 교육투자’ 긍정 효과

농지개혁이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농민들의 인센티브에 큰 도움이 됐다. 지주-소작 관계에서는 열심히 일할 이유가 적었다. 농지개혁 이후, 농민들은 모든 가족 구성원이 열심히 일했다. 인센티브의 힘은 참으로 막강하다.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교육투자와 연결됐다. 농지개혁이 되지 않았다면, 지주 계급과 농민 모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진국 함정에 빠지게 된 남미와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한 나라의 장기적 경제성장과 상관관계가 가장 높은 것 중 하나는 ‘교육투자’다. 비슷한 시기에 도입된 의무교육 제도와 맞물려, 농지개혁은 모든 자녀를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보내도록 촉진했다. 

농지개혁은 누구의 업적인가? 혹은 이승만과 농지개혁의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냉전우파와 냉전좌파의 해석이 공존한다. 먼저, 냉전우파의 해석을 살펴보자. 냉전우파 해석의 핵심은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승만 대통령 개인’의 업적으로 치환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냉전좌파의 해석을 살펴보자. 1980~90년대 학생운동 세력이 세미나를 통해 배웠던 내용이다. 이들 논리는 크게 3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북한이 먼저 농지개혁을 했고, 남한의 농지개혁은 ‘북한의 압박’으로 된 것에 불과하다. 둘째, 북한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했고, 남한은 ‘유상몰수-유상분배’를 했기에 북한의 농지개혁이 더 우월하다. 셋째, 이승만은 양민학살을 했고 3·15 부정선거를 했기에 이승만의 농지개혁 업적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냉전우파와 냉전좌파의 해석을 어떻게 봐야 할까? 먼저, 냉전우파의 해석이다. ‘냉전우파적’ 해석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반박될 수 있다. 첫째, 농지개혁은 ‘남한’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니다.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에서는 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주도해 실시한다. 왜 일본, 한국, 대만은 농지개혁을 했을까? 모두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농지개혁이 실시된 나라들은 모두 ‘강력한 공산화의 압력’에 의해 실시된 측면이 강했다. 

ⓒ대한상의 제공
7월15일 대한상의 제주포럼 강연에 앞서 최태원 회장과 전시 부스를 둘러보는 한동훈 장관 ⓒ대한상의 제공

공산주의 운동하던 조봉암에게 임무 맡겨

둘째, 농지개혁의 실제 내용은 ‘강제적’ 유상몰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매우 과격한 조치였다. 지주들의 토지는 1년치 지대의 15할(1.5배)로 보상됐다. 쉽게 말해, 농민 입장에서는 1년6개월치 분량의 수확물을 내면 지주의 토지가 농민의 토지로 바뀌는 조치였다. 오늘날 월세 세입자로 비유하면, 1년6개월치 월세를 추가로 납부하면 주인 집이 세입자 집으로 바뀌는 격이었다. 지주 입장에서는 ‘헐값’에 토지가 팔리는 격이었다. 지주들은 이를 지가증권으로 받았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20분의 1 가치만 지불하면 됐다.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80~40% 가격으로 할인해(깡을 해서) 파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다음으로 냉전좌파의 해석을 살펴보자. 당시 남한 농지개혁이 북한 농지개혁의 ‘압박’을 받아 실시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의 농지개혁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특히 농민의 관점에서 그랬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결과적으로 ‘김일성 가문’에 귀속된다. 북한은 이후 ‘농지 국유화’가 이뤄진다. 농민 입장에서는 처분권도 없고, 상속권도 없다. 수확물의 일부를 배분받을 뿐이었다. 지주 계급에게 상납하던 것이 김일성 가문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북한 농업의 생산성 정체가 발생하는 근본 이유다. 농민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의 농지개혁은 온전히 ‘농민의 것’이 됐다. 농민 입장에서 처분권도 있고, 상속권도 있다.

농지개혁과 이승만의 관계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이승만 역시 초기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다. 그걸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죽산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지명한 것이다.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조봉암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공산주의 운동과 선을 긋고, 공개 전향을 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농지개혁에 대한 이승만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적 시각이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관점이든, 농지개혁은 용인되기 어려운 매우 과격한 정책이다. 물론 북한 농지개혁은 사유재산을 전면 부정했고, 남한 농지개혁은 사유재산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그렇더라도 남한의 농지개혁은 ‘강제적’ 유상몰수였다. 보상액 역시 당시 실제 가치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헐값’ 유상몰수와 ‘헐값’ 유상분배였다. 

1950년 실시된 농지개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훗날 농지개혁과 대한민국 발전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은 ‘좌우합작으로 건국된’ 나라다. ‘세력’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우파의 나라’로 출발했다. 훗날 조봉암의 죽음, 장준하의 죽음이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농지개혁은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핵심 정책이었다. 농지개혁을 실시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세력의 핵심 정책을 수용해서’ 만들어진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이제 우린 한국 현대사를 바라볼 때 냉전좌파와 냉전우파만의 시각을 극복할 때가 됐다. 한국은 좌우 날개로 만들어져 성공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좋은 불평등》 저자)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좋은 불평등》 저자)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