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서적 올바름’의 독재 혹은 완장질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kjm@jbnu.ac.kr)
  • 승인 2023.08.04 17:05
  • 호수 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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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망언을 했다.” 2021년 12월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 전용기가 국민의힘 대선후보 윤석열을 향해 한 말이다. 이미 윤석열의 실언이 많았던지라 “또 무슨 실언을 했나?”라는 궁금증을 안고 기사를 읽다가 실소하고 말았다. 윤석열이 장애인 앞에서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나.

‘장애우’는 오랫동안 진보적 용어였으며, ‘장애우’라고 하지 않으면 따가운 눈총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 걸 모른 걸까? ‘장애우’는 장애인을 향한 우월의식과 시혜적 시선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해서 2015년부터 쓰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미 입에 붙은 표현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는가? 그래서 2017년 당시 여권의 지도자급 인사인 이재명과 추미애도 이 말을 사용했지만, 그 누구도 ‘비수를 꽂는 망언’ 운운하는 격한 비난을 하진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용기는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의 문제를 제기하다가 실수를 저지른 셈인데, PC 운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완장질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을 바로잡자는 PC의 취지는 좋은데, 그걸 실천에 옮기는 방법이 늘 문제다.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PC 위반자에게 면박, 심지어 모욕까지 주는 완장질이 PC를 죽인다.

PC 운동은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지만, 한국이 원조 국가인 운동도 있다. 그건 바로 ‘정서적 올바름’ 운동이다. PC 운동과 비슷하긴 하지만, 정서적인 면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EC(Emotional Correctness)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이걸 거의 완벽하게 실천해 성공한 인물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누군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다.

한 사례로 1987년 5월에 일어난 스타크함 피격 사건을 보자. 해군병사 37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정책적 대실패로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할 중대 사건이었지만, 레이건은 EC로 돌파했다. 장례식이 거행된 플로리다의 해군기지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를 껴안는 레이건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으며, 이 감동적인 장면을 미국의 거의 모든 국민이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이 드라마틱한 ‘한 방’으로 레이건이 저지른 군사정책 과오에 대한 책임은 실종되었으며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에 역사학자 헨리 그래프는 뉴욕타임스에 ‘대통령은 목사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그런 ‘이미지 정치’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텔레비전 앞에서 목사 노릇을 잘 못하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단 말이냐고 그래프는 반문했다.

한국엔 더 큰 문제가 있으니, 그건 바로 한국인의 ‘감정발산 기질’에 편승한 EC의 정치적 쟁점화와 정략적 이용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된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책임 회피를 위해 EC에 위배되는 발언들이 나온다. 그걸 응징하는 건 백번 옳지만, 문제는 그게 정치권의 선동적인 ‘정략적 정치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말의 전도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참사의 재발을 막는 제도적 개혁은 사라지고, 그래서 달라진 건 거의 없는 가운데, 여야 정당 간 정파적 손익계산서만 남는 비극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EC를 중시하는 건 한국 사회에 공동체적 관심이 살아있다는 걸 말해 주는 증거로 좋게 볼 일이지만, 정략이 성공해 ‘EC의 독재’로까지 나아가는 건 곤란하다. 실질의 변화를 방해하면서 위선과 가식만 키우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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