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기에 믿음 있지만 아직도 불안하다”
  • 하은정 우먼센스 대중문화 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8.12 11:05
  • 호수 1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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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연기 정점 찍은 이병헌

명실상부 대한민국 넘버원 배우 이병헌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 다시 한번 연기의 정점을 찍었다. 이 작품은 영화 전문기자들 사이에서 올해 여름 개봉된 영화 중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병헌의 연기가 한몫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의 생존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가운데 외부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황궁 아파트를 찾아오고, 이는 황궁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생존의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주민 대표 ‘영탁’을 중심으로 외부인을 막아선 채 자신들만의 생존 규칙을 만들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이병헌은 극 중 황궁 아파트의 주민 대표 영탁 역을 맡았다. 아파트 안에서 점점 영향력을 넓혀가는 영탁의 변화를 디테일하고 치밀한 감정선으로 표현해 내며 관객을 압도한다. 친근한 이웃의 소탈한 웃음을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캐릭터다. 연출을 맡은 엄태화 감독이 “캐릭터의 사연을 표정으로 한순간 다 표현해 내는 장면을 보면서 ‘아, 이게 진짜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감탄할 만큼 독보적인 연기와 존재감을 과시했다는 후문이다.

이병헌을 필두로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이 열연한다. 이미 전 세계 152개국 선판매를 체결했고, 시체스 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하와이 국제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으며 글로벌 극장가에서도 관심이 뜨겁다. 개봉 직전 이병헌을 만나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BH엔터테인먼트 제공

반응이 좋다.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다행이다 싶다. 저도 재미있게 봤다. 영화를 만들고 나서 공개되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렸다. 초반에 봤던 편집본과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느껴졌다. 감독님의 노력이 느껴졌다. 후반 작업에 모든 정성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부터 강렬했다.

“사실 배우로서는 첫 장면이 강렬하면 불안한 마음도 있다. ‘과연 관객들이 내 감정을 이해할까’ 싶은 마음이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더라.”

출연을 결심한 데는 시나리오의 영향이 컸을 텐데,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너무 재미있었다. 동시에 ‘이게 무슨 영화야?’ 하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세상이 온통 지진 때문에 무너졌는데 우리 아파트만 살아남아 있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살짝 만화적인 느낌도 있었다. 사실 만화적인 설정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니 여러 인간 군상과 그 안의 디테일한 감정과 갈등이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설정은 만화적이나 내용은 무척 사실적이었다.”

영탁이라는 캐릭터를 잡아가는 과정도 궁금하다.

“대본에 있는 대로 했다. 결국 대본에 있는 캐릭터를 살아있는 인물처럼 연기하는 게 배우의 몫이다. 어떤 작품에서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노력한다. 감독님과는 대화를 많이 했다. 디렉션을 많이 하지 않는 감독이라 제가 먼저 대화를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 다른 작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이고, 그걸 감독에게 고르라고 한다. 물론 그런 제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도 있고 힘들어하는 분도 있다(웃음). 이번 엄태화 감독은 좋아했다.”

‘블라인드 시사(영화 개봉 전 일반관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비밀 시사회)’를 다녀온 것으로 안다.

“조용히, 몰래, 마스크 쓰고 다닌다. 어떤 작품이든 가는 편인데, 이유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서다. 영화를 보고 내가 느끼는 반응이 꼭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번지점프를 하다》의 경우 기자 시사회 때 반응이 좋지 않았다. 심각한 장면인데도 낄낄 웃는 분이 많아 현장에서 숨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리뷰는 좋더라. 이번 블라인드 시사에서도 관객들의 반응을 면밀하게 지켜봤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다. 그럼에도 본인의 연기에서 부족한 점을 꼽자면.

“극단적인 감정을 연기했을 때는 연기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관적인 판단이 과잉될 수도 있고, 혹은 너무 자제해서 조금 모자란 감정을 보여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에게 믿음이 있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공존한다. 내가 그려낸 정서가 내 의도처럼 전달될지 늘 생각하며 연기한다.”

이번 작품은 ‘블랙코미디’를 품은 재난영화라고 표현되고 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는 어떤가.

“코믹한 장면을 연기할 때 모든 스태프가 즐겁게 촬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그것만이 내 세상》의 경우 현장이 무척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또한 코미디 요소가 가미된 작품들은 많은 것들을 시도할 수 있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시도하고, 또 웃으며 촬영했다.”

비주얼도 그렇지만 헤어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하다.

“분장팀 그리고 감독님과 외모 설정을 하는데 머리가 굵게 옆으로 자라는 스타일로 가자고 하셨다. 깎은 지도 좀 시간이 지난, 그러면서도 약간의 터치를 해서 전체적으로 M자 스타일로 말이다. 아이디어를 만들면서도, 팬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예상하긴 했다(웃음). 눈치 못 챘겠지만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헤어스타일의 각도가 달라진다. 마지막에 권력이 생겼을 때의 머리는 엄청 옆으로 뻗쳐 있다. 미세하게 변화를 줬다.”

극 중 캐릭터의 감정은 극단적이었다. 어떻게 이해했나.

“간단하다. ‘당시 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야’라고 이해한다. 결국 연기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는 방법은 나에 대한 믿음밖엔 없다. 내가 해석한 감정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믿음 말이다.”

연기에 대한 믿음은 언제부터 생겼나.

“불안감을 가지고 연기하면 너무 힘들지 않나. 그래서 의도적으로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다음 연기도 잘할 수 있다. 계속 불안해하면 캐릭터를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껏 작품을 해오면서 대체로 관객들의 반응과 내 감정이 비슷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게 쌓여서 믿음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스토리상 비극의 시작은 영탁이 우두머리가 된 후부터다.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적으로 저는 영탁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식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영탁은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감과 절망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주민 대표가 됐다. 실제로 영탁은 루저 같은 삶을 살았고 어디에서도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수룩하고 주변머리도 없다. 반패닉 상태에서 주민 대표가 됐고, 얼이 빠져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다가 점점 군중심리도 이용하게 되고 군림할 줄도 아는 리더가 됐다. 이 모든 게 신분의 변화에서 오는 둔탁하고 거친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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