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토피아에서 펼쳐지는 소시민의 지옥도 《콘크리트 유토피아》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8.12 13:05
  • 호수 1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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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축소판인 아파트를 배경으로 ‘인간성의 본질’ 파고들어

대지진 후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단,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만 빼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같은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통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 체계가 망가진 세상에서 최우선의 문제는 생존 그 자체다. 그간 확고하게 나를 지탱한다고 생각했던 가치관들이 무색해지는 순간, 여전히 인간이기에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 

올해 여름 순차적으로 선보인 한국 영화 텐트폴 네 편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관객을 찾는다는 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짊어진 부담은 적지 않다. 앞으로는 먼저 개봉한 《밀수》의 방어가 아직 탄탄하고, 뒤로는 올해의 기대작 중 하나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의 공세가 예정된 만큼 대진운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완성도와 재미의 측면에서 보자면, 흥행의 판세를 뒤집을 저력이 충분한 작품이다. 한국 재난영화의 역사에 또 하나의 색다른 획이 그어졌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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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 위에 세워진 재난의 풍경 

재난 앞에서 기존 사회 질서는 무용하다. 중앙정부 구조가 무너진 후 공동체는 집단적이고 국지적으로 작게 분열된 채 유지될 수밖에 없다. 이 형태는 차라리 부족이라 칭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그 안에서 변화된 생활양식에 근거해 다수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 방식의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이때 인간 의지는 어느 쪽으로 발휘되기가 더 쉬울까. 문명의 증거인 인간성과 이타심, 연대 의식 같은 건 위기 의식 속 본능 앞에서는 가장 먼저 버려지는 가치일지 모른다. 재난 상황에서 약탈과 징발을 구분해야 하듯, 그 역시 비난할 수만은 없는 생존의 방식이다. 그러나 더 나은 결정을 추구하는 인간 행동을 둘러싼 딜레마는 언제나 존재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재난의 풍경은 이 딜레마 위에 세워진다. 

대지진이 만든 폐허 속에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선 황궁 아파트는 하루아침에 살아남은 자들의 ‘유토피아’로 변모한다. 바깥은 강추위가 몰아닥치는 한겨울,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이 아파트로 모여들자 한정된 물자로 살아남아야 하는 입주민들은 위협을 느낀다. 이들은 곧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규칙을 세우고 단체행동에 돌입한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살신성인의 자세로 불 속에 뛰어들어 진압했던 902호 영탁(이병헌)이 의심할 바 없이 주민 대표로 선정되고, 영탁을 중심으로 주민들만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애초에 아파트 주민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수색대, 의무반 등을 꾸리는 활동에 돌입한다. 식수 및 생활용품은 생존 기여도에 따른 차등 배급을 원칙으로 한다. 외부인 출입은 철저히 금지다. 이들이 아파트 바깥 생존자들을 어느덧 ‘바퀴벌레’라 칭하는 사이, 그들 사이에서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괴소문이 나돈다. 황궁 아파트의 질서는 영탁의 활약 아래 짐짓 잘 유지되지만, 주민 외 생존자를 배척하는 방식에 인간적인 고민과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 조금씩 꿈틀대던 갈등은 외부에서 생존해 집으로 돌아온 혜원(박지후)의 등장으로 본격화된다.  

영화의 원작은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이다. 지진으로 무너진 학교 지하실에 갇혔던 ‘왕따’ 동현과 그 일행이 건물을 빠져나와 우경 아파트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지진으로 무너진 세상, 유일하게 멀쩡한 아파트 건물이라는 기본적 세계관만 공유했을 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실상 원작과는 전혀 다른 가지를 뻗는다. 배경은 원작의 상상력이 토대였다 하더라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몇 발은 더 나아가는 영화다. 블록버스터로서의 역할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네마의 본령을 잊지 않는 순간들이 침착한 인상의 격을 만든다.  

엄태화 감독이 촬영 전에 스태프에게 제시한 레퍼런스는 파블로 피카소가 1937년에 그린 대작 《게르니카》였다고 한다. 나치 공군기의 폭탄 투하로 인해 폐허로 변한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담은 그림 속에서는, 전쟁의 비참함에 노출된 평범한 이들의 절규가 울려 펴지고 있다. ‘소시민들의 지옥도’라는 점에서 그림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정확한 토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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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았다는 착각에 빠진 이들의 광기  

“저는 이 아파트가, 우리 주민들이 선택받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탁의 대사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모든 아이러니를 함축하는 한마디다. 무너지지 않고 생존했기에 기적이라 불리던 것은 이내 곧 새로운 특권이 된다. 주거지역이기 이전에 부동산 가격으로 먼저 등치되는 공간인 아파트를 중심으로 펼쳐지기에 영화 속 공포는 한층 더 현실적이다. 재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부동산을 소유하기 위해 기울였던 금전적 노력은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감투를 부담스러워하던 영탁은 어느새 주민들의 영웅이자 부조리한 독재자 그 어딘가에 서있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착각에 빠진 이들의 집단적 광기는 기이한 활력을 내뿜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장르) 영화에 속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을 스펙터클로 치환해 보여주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규모와 기술이 강조되기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인간성 본질의 탐구를 추구한 블랙코미디 형태에 가깝다. 이는 오늘날 욕망의 집합체이자 한국 사회의 가장 정확한 축소판인 아파트를 배경 삼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정해진 수순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다. 부의 척도이자 사회경제적 계급의 새로운 기준이다. 실제로 엄태화 감독은 영화의 제목을 자료 조사차 읽었던 동명의 인문서적에서 따왔다. 아파트가 한국 사회에 신중산층을 탄생시킨 배경이자, 베이비붐 세대가 다른 세대와 자신들을 구분하는 자산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파트는 다수가 일부의 생활 영역을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영화에서 적절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이웃의 정체가 불투명하다는 점에서다. 또한 공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집단행동은 합리적 지성보다는 공동체를 장악하는 특정 기운의 양상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안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적 유토피아가 돼버린 공간.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공간. 이를 둘러싼 인간의 욕망만큼은 폐허가 되는 법이 없다. 재난 후 처음으로 주민들이 다 같이 파티를 열던 날, 윤수일의 유행가 《아파트》를 열창하는 영탁의 얼굴로 시작해 카메라가 그의 진짜 욕망을 알 수 있는 플래시백으로 파고들어 갔다 다시 빠져나오는 흐름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내 집 한 채 가지는 게 인생의 꿈이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생존 앞에서 거침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교리는 허망한 글자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선과 악의 대립이라기보다, 상식선에서 펼쳐지는 이타와 이기 사이의 딜레마라는 점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핵심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민성(박서준)은 안정적인 삶이 최우선이기에, 점점 폭군으로 변모해 가는 영탁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아내 명화(박보영)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비인간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화의 생각은 다르다. 타인을 배척하며 괴물이 되는 것은 삶이 아니다. 그의 신념은 때로 생존 의지보다 강하다. 그러나 이들 중 누가 가장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다양한 인물의 선택을 비추며 그것을 다시 관객 각자의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고민으로 치환해 내는 이 영화의 질문은 값지다. 

이병헌을 포함한 주요 배우들에게서는 그들의 최근작 중 가장 인상적인 얼굴이 발견된다. 연기, 극의 주제, 스타일, 테크닉 면까지 두루 잘 잡은 작품이다. 《가려진 시간》(2016)으로 인상적인 상업 데뷔전을 치렀던 엄태화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한국 영화 ‘다음 세대’의 어떤 증거를 보여준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희망은 더디게 발견되겠지만 그럼에도 의지를 굳건히 응원하겠다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대사를 돌려주고 싶은 영화다. 극 중 인물들에게도,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도. 

 

■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심장, 이병헌

이병헌의 연기에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찬사의 수식어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갈아끼우는 듯한 그의 능력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등 떠밀려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 어수룩한 대표자로 시작해, 이병헌이 연기하는 영탁의 캐릭터는 극의 분기점마다 수시로 온도와 형태를 바꾸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된다. 복잡한 겹을 가진 인물의 사연을 하나씩 알맞게 펼쳐 보이는 이 배우의 완급 조절은 탁월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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