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색깔론에 휩싸인 광주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
  • 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3.08.2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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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강기정 광주시장, SNS에서 설전
朴장관 “48억 혈세 사업 철회해야” vs 姜시장 “적대 정치 그만해”
광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때아닌 색깔론에 휩싸였다. 광주시가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 일대에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게 발단이 됐다. 이를 두고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강기정 광주시장은 SNS에서 설전을 벌였다. 23일 오전 정율성 생가 모습 ⓒ시사저널 정성환
광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때아닌 색깔론에 휩싸였다. 광주시가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 일대에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게 발단이 됐다. 이를 두고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강기정 광주시장은 SNS에서 설전을 벌였다. 23일 오전 정율성 생가 모습 ⓒ시사저널 정성환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두고 국가보훈부 장관과 광주시장이 충돌했다. 광주시가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 일대에 48억원을 투입해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게 발단이 비롯됐다. 지난 22일 “48억원을 누구에게 바친단 말입니까?”이라는 문패로 시작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글에 강기정 광주시장이 “광주는 정율성 역사공원에 투자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페이스북 설전’을 벌였다. 

SNS 글에서 박 장관은 “북한의 애국열사능이라도 만들겠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하며 공원 조성사업 전면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자 강 시장은 이를 색깔론으로 치부하며 “나와 다른 모두에 등 돌리는 적대 정치 그만하라”고 되받아쳐 논쟁이 꼬리를 물게 됐다. 


박민식 “6·25전쟁 때 중공군 위로한 사람”

박 장관은 이날 SNS에 올린 글에서 “광주광역시가 올해 말까지 ‘정율성 기념 공원’을 짓는다고 한다”며 “광주에는 ‘정율성로’도 있고 ‘정율성 생가’도 보존돼 있다. 음악제나, 고향집 복원 등에도 많은 세금을 썼는데, 안중근, 윤봉길도 못 누리는 호사를 누려야 할 만큼 그가 대단한 업적을 세웠나”라고 반문했다.

박 장관은 “정율성이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인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장본인이라며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계획을 비판하며 1948년 정율성이 김일성한테 받은 상장 사진을 올렸다. ⓒ페이스북 캡처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계획을 비판하며 1948년 정율성이 김일성한테 받은 상장 사진을 올렸다. ⓒ페이스북 캡처

또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장을 지냈으며,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해 단장이 됐다”며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가는 한국전쟁 내내 북한군의 사기를 북돋웠다”고 비판했다. 이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위문공연단을 조직해 중공군을 위로한 사람”이라며 “중국으로 귀화해 중국 공산당을 위한 작품을 쓰며 중국인으로 생애를 마쳤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조선인민군 행진가를 만들어 6·25 전쟁 남침의 나팔을 불었던 사람, 조국의 산천과 부모·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공산군 응원 대장이었던 사람이기에 그는 당연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1948년 2월 정율성이 북한의 인민 경제계획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이유로 김일성에게서 받은 상장 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박 장관은 “김일성도 항일운동을 했으니 기념공원을 짓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라며 “광주시 차원의 시 재정이 쓰인다고는 하지만 시 재정은 국민의 혈세가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자유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을 국민 세금으로 기념하려 하는 광주시의 계획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전면 철회돼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강기정 “광주의 역사 문화자원…中 관광객들 많이 찾아"

이에 대해 강기정 광주시장은 페이스북에 “광주는 정율성 역사공원에 투자한다”는 반박 글을 올렸다. 강 시장은 공원 조성 목적으로 한중 우호와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들었다. 그러면서 반일(反日) 코드와 ‘시진핑 중국 주석이 꼽은 한중우호 기여 인물’이란 점도 강조했다.

강 시장은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을 두 가지 색깔, ‘적과 나’로만 보인다”며 박 장관의 주장을 색깔론으로 치부했다. 강 시장은 “광주는 정율성 선생을 영웅시하지도, 폄훼하지도 않는다”며 “뛰어난 음악가로서의 그의 업적 덕분에 광주에는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이 찾아온다. 광주는 정율성 선생을 광주의 역사 문화자원으로 발굴하고 투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기정 광주시장이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강 시장은 박 장관의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치부하며 공원 조성 목적으로 한중 우호와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들었다. ⓒ페이스북 캡처
강기정 광주시장이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강 시장은 박 장관의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치부하며 공원 조성 목적으로 한중 우호와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들었다. ⓒ페이스북 캡처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가 겸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중국인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시대의 아픔”이라고 평가했다.

강 시장은 “정율성 선생은 시진핑 주석이 한중우호에 기여한 인물로 김구 선생과 함께 꼽은 인물”이라며 “나와 다른 모두에 등을 돌리는 적대의 정치는 이제 그만하시고 다른 것, 다양한 것, 새로운 것을 반기는 ‘우정의 정치’를 시작하시죠”라고 반박했다. 2014년 시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우호 상징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만든 정율성 선생”을 콕 집어 말한 것을 기념의 근거로 댔다.

그러자 박 장관도 재반박에 나섰다. 그는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니. 돈이 되는 일이면 국가 정체성이고 뭐고 필요 없단 말이냐”며 “호남은 군산고 등 6·25 때 가장 많은 학도병을 배출한 학교가 있는 곳이다.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영웅이 많은데 하필 공산당 나팔수의 기념공원을 짓겠다는 거냐”고 썼다. 

정율성이 잠시 다녔다는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외벽에 그려진 정율성의 대형 벽화. ⓒ화순군
정율성이 잠시 다녔다는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외벽에 그려진 정율성의 대형 벽화. ⓒ화순군

광주시, “韓中 우호 위해 48억 투입, 공원 조성”

광주시는 10여 년 전부터 정율성로(路)를 비롯한 기념관과 동상, 정율성 음악제 등을 마련했다. 정율성의 항일 독립 정신을 기리고, 한중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명목에서다. 광주시는 2020년 5월 동구 불로동 생가 일대 878㎡에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했으며, 총 48억원을 들여 올해 연말까지 공원 조성을 완료할 방침이다. 

중국 인민해방군가와 북한의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鄭律成·1914?~1976)의 삶과 음악 세계를 기리는 광장, 정자, 관리 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토지 보상비를 포함, 예산 48억원이 투입된다. 전남 화순군도 비슷한 사업을 했다. 화순군은 2019년 정율성 고향 집(12억원)을 복원했다.

그러나 단순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6·25전쟁 때 국군과 맞서 싸운 북한과 중공의 군가를 여럿 작곡한 인물을 대한민국의 세금으로 기념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두고 문제가 제기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율성은 누구?

 

정율성(鄭律成·1914?~1976) ⓒ광주시 홈페이지
정율성(鄭律成·1914?~1976) ⓒ광주시 홈페이지

정율성은 광주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중국 혁명음악가다. 그는 광주와 화순에서 학교를 다녔다. 1933년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음악가가 됐다. ‘오월의 노래(1936년)’, ‘팔로군 행진곡(1939년)’ 등을 작곡해 근·현대 중국 3대 음악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광복 이후 정율성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장 김원봉이 중국 난징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중국 시인의 가사를 바탕으로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해방이후 북한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행진곡’ 등을 작곡했지만 6·25 전쟁 중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중국 인민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전선 위문 활동을 펼쳤다. 정전 이후 북한에 정착했다가 1956년 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하자 중국으로 귀화했고 197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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