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테러에서 피어난 새로운 공동체, 뮤지컬로 재현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9.16 11:05
  • 호수 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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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바탕으로 제작한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11월 한국 초연 예정돼 있어 주목

불과 한 세기 전, 서구 열강은 온통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생명과 물자를 취득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1차 세계대전(1914~18)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불씨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까지도 삽시간에 번졌다.

1차 대전의 포화를 피해 유럽에서 대거 망명한 예술인들로 인해 미국에서는 모더니즘이 꽃피었다. 당시 인기가 높은 뮤지컬 무대에서는 전쟁을 소재로 한 쇼가 대거 유행했다. 하지만 2차 대전에 미국이 직접 참전하고, 더 이상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자 공연 작품의 양상도 달라졌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 미국 뮤지컬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을 다루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전쟁 소재는 아니더라도 평화로운 세계에서 누리는 미국인의 소중한 일상을 다루는 작품도 대거 등장했다. 이때 발표된 《남태평양》(1949)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미국 뮤지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의 한 장면 ⓒMatthew Murphy 제공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의 한 장면 ⓒMatthew Murphy 제공

재난 상황에서 현실 비추는 거울이 되는 뮤지컬

이후 냉전시대에 접어들며 국가 간 전면적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중 베트남 전쟁이 터졌다. 국민 사이에서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반전 여론이 높아지면서 《헤어》 같은 반항적인 청년 문화를 담은 뮤지컬이 등장하기도 했다. 대다수의 뮤지컬이 비현실적인 꿈과 환상을 이야기하는 데 익숙하지만, 인류의 존재가 위협받는 재난 상황이 닥치면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 동시대성을 유지하면서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작품들이 등장하곤 했다.

2001년 9월11일. 뉴욕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여객기 두 대가 맨해튼 남쪽의 랜드마크 건물이기도 했던 세계무역센터를 타격해 엄청난 희생자가 나온 사건이다. 그리고 16년 후,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테러 사건으로 꼽히는 이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개막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2017)는 테러로 인해 당시 미국 영공이 폐쇄되고, 모든 공항에 착륙이 금지되면서 비행기 38대가 캐나다의 작은 마을인 뉴펀들랜드의 갠더 공항에 비상착륙하면서 시작한다. 승객 숫자는 약 7000명으로 마을 주민 전체보다도 많았다. 영문도 모르고 비상착륙해 공포에 떨고 있던 이 승객들을 마을 사람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당시 그 마을에는 스쿨버스 파업 이슈가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합심했다. 임시 피난처를 마련해 승객들을 수용하고 의식주를 제공하면서 그들이 무사히 각자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실화가 있었다. 이른바 ‘갠더 공항의 기적’이었다.

작품 속에서 승객들은 영문도 모르고 낯선 공항에 도착했지만, 땅에 발을 디디기까지 만 하루 이상이 걸렸다. 이들은 기약 없이 기내에 갇혀 혼란스러운 자신의 상황을 노래하며 불안감을 진정시키다가 마을에서 드디어 자신들을 수용한다는 조치가 내려지자 비로소 피난처를 찾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끔찍한 테러 소식을 접하고 목적지로 당분간 갈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낙담한다. 이런 승객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의식주 제공은 물론이고 심신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테러의 주체가 무슬람계라는 게 밝혀지면서 무슬람 승객들 주변에서 잠시 술렁임이 일기도 하지만, 이내 피부색과 국적이 다른 승객들도 서로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테러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임을 알고 점차 인류애를 발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 작품은 마을 사람들과 승객들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과정을 자세히 그렸다. 마을 사람들은 부족한 숙박시설을 보충하기 위해 공공시설뿐 아니라 자기 집을 개방해 홈스테이를 열었다.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집단 레크리에이션 시간도 만들었다. 승객들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마을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이국적인 요리 솜씨를 발휘하기도 한다. 《컴 프롬 어웨이》는 사회적 재난 상황에서 인류애를 바탕으로 공동체 활동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일종의 정서적인 다큐멘터리라고도 할 수 있다.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의 한 장면 ⓒMatthew Murphy 제공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의 한 장면 ⓒMatthew Murphy 제공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의 한 장면 ⓒMatthew Murphy 제공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의 한 장면 ⓒMatthew Murphy 제공

실화 바탕으로 뮤지컬 제작되면서 명성 얻어

이 작품이 재미난 점은 배우들이 마을 사람과 승객을 모두 연기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다역 연기는 결국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같은 인류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은 승객이지만 내일은 마을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연출가 크리스토퍼 애슐리는 이런 무대 설정으로 토니상 연출상을 수상했다.

가장 인상적인 곡은 《나와 하늘(Me and the Sky)》이라는 아메리칸 항공사의 여자 기장 베벌리 배스(Beverley Bass)의 솔로곡이다. 미국 최초의 여객기 여자 조종사로서 어린 시절의 꿈부터 현재까지를 돌이켜보며 벅찬 자긍심을 갖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평생 몸담은 비행기가 테러범의 폭탄이 돼버린 현실에 대해 황망해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조건 없는 배려는 그 후 큰 보답으로 돌아왔다. 당시 도움을 받은 7000명의 승객 중에서 3000명 이상이 이듬해 휴가 때 주민들의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재방문한 것이다. 사회적 재난에 대응하는 뉴펀들랜드 마을의 민관 협동이 빛을 발한 결과로 관의 리더십과 민의 공동체 의식이 결합해 스토리가 있는 관광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이 그 마을을 기억하게 됐다.

화려하고 솜사탕 같은 대형 뮤지컬들 속에서 이 작품은 실화를 소재로 한 휴먼스토리이기에 더 각별하게 돋보인다. 뉴욕 현지 관객들과 평단도 일제히 “암울한 시기에도 인간의 친절함을 담을 수 있는 능력과 증오에 대한 인류의 승리를 음악과 함께 잘 표현했다”는 극찬을 했다. 오는 11월 드디어 한국 초연이 예정돼 있는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기대된다. 공연 전에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OTT 중에서 애플TV+에서 공연 실황이 서비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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