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커창은 사망을 당했다” 소문 확산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1.05 08:05
  • 호수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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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지 환자를 장기간 치료 전문병원으로 후송…시진핑 최측근, 사망 예견한 듯한 행동도
텐안먼광장에 수많은 추모객 몰려들어…톈안먼 사건 촉발한 ‘후야오방 사망’ 데자뷔

10월27일 0시10분 리커창 전 중국 총리가 상하이에서 휴식하던 중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리커창이 위독하다는 소식은 이미 26일 늦은 오후부터 중국 내외 각종 SNS를 통해 흘러나왔다. 실제로 리커창이 심장마비를 일으킨 후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긴급 호송되는 동영상까지 공개되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이런 SNS의 모든 소식을 즉각 삭제했다. 게다가 리커창이 사망한 후 8시간 가까이 지난 아침 8시에야 국영 CCTV를 통해 정식 발표했다. 리커창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14억 중국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올해 68세인 리커창이 자연사하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였기 때문이다. 중국인 남성의 평균수명이 75.3세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게다가 리커창은 올해 3월 공직에서 은퇴했으나, 지난 10년 동안 중국 최고지도부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에 이은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중국에서는 한국의 2급 이상에 해당하는 고위공무원이 퇴직할 경우 2년 동안 현직 때와 똑같은 대우를 해준다. 최고지도부 격인 공산당 중앙정치국원을 역임하면 죽을 때까지 현직처럼 각종 혜택을 받는다.

이뿐만 아니라 리커창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8월30일 간쑤성 둔황시의 막고굴에서 이전처럼 건강한 모습이었다. 수백 명의 관광객이 “총리님 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맞이하자, 리커창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인사했다. 그래서인지 사망 당일 오후부터 리커창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대륙 전역에서 일어났다. 특히 저녁에 베이징시 톈안먼광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창안제에서 차량 운행이 중단될 정도였다. 주목할 점은 인파 대부분이 20대 젊은이거나 아이와 함께 온 30대 부부였다는 것이다.

ⓒAP 연합·EPA 연합
10월28일 고(故) 리커창 전 중국 총리(왼쪽 사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주민들이 조화를 놓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리 전 총리는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AP 연합·EPA 연합

당국, 검열 통해 리커창 추모 열기 억눌러

베이징에서 특정인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 톈안먼광장과 창안제가 ‘점령’당한 것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심지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덩샤오핑이 죽었던 1997년 2월에도 이러진 않았다. 당시 필자는 베이징에서 지냈기에 그 기억이 또렷하다. 그런데 이번에 톈안먼광장에 몰린 인파 규모나 추모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부 대학생은 10월28일 0시가 넘어서도 귀가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인원은 리커창의 대학 후배인 베이징대 학생들이었다. 결국 대학에서 달려온 직원들이 귀가를 종용하자, 새벽이 가까워서야 해산했다.

이런 광경이 사진과 동영상으로 중국 SNS를 통해 대륙 전역으로 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국은 모든 삭제했다. 검열이 단행된 것이다. 다른 도시에서 벌어진 추모 행사나 모임을 찍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10월28일 오후부터 중국 각지에서 묘한 소문이 떠돌았다. 리커창이 심장마비로 자연사한 게 아니라 ‘사망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의혹을 취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리커창이 제대로 심폐소생술을 받았는지, 왜 중의(中醫)병원으로 호송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리커창은 호텔에서 수영하던 도중에 갑자기 심정지를 일으켰다.

리커창은 현직처럼 수많은 비서와 경호원의 보호 아래 있었다. 이 중에는 의사나 간호사도 있다. 왜냐하면 리커창은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고 과거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정지는 5분 이내의 골든타임에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해야 한다. 여기에 제세동기의 도움을 받으면 더욱 좋다. 항상 의사나 간호사의 보호 아래 있는 리커창은 정확한 CPR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리커창이 앰뷸런스로 실려가는 동영상을 보면, 오직 한 명의 간호사가 옆에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게다가 리커창이 임종한 곳은 상하이중의대학 부속 수광병원이었다.

수광병원은 전국 10대 중의병원이자 상하이 10대 종합병원이다. 수광병원은 심혈관내과가 있어 평소 심장에 문제가 있는 환자로 북적인다. 하지만 중국에서 심정지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환자를 중의병원으로 호송하는 일은 거의 없다. 중국인들이 중의병원을 찾는 이유는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경우다. 중의병원의 심혈관내과도 긴 시간을 두고 치료하는 데 익숙하다.

둘째, 중국 최고지도부가 리커창의 급사를 마치 예상한 듯했다는 의혹이다. 한 달 전에 차이치가 리커창 경호요원에게 유언을 받아놓으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그 배경이다. 차이치는 지난해 10월 제20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던 시진핑 주석의 최측근이다. 시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 재임시절 인연을 맺은 측근 그룹인 ‘즈장신쥔(之江新軍)’의 선두주자다. 나이도 시 주석보다 2세 아래여서 사석에서는 호형호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래 차이치는 덩샤오핑이 남긴 인사 원칙인 ‘칠상팔하(67세는 남고 68세 이상은 퇴임)’로 보자면 상무위원이 되기 힘들었다. 지난해 67세로 나이가 이미 꽉 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상무위원으로 승진했고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판공청 주임까지 겸임하며 권력 서열 5위가 되었다. 중앙서기처는 공산당 내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중앙판공청은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핵심 포스트다. 이런 자리에 있는 차이치가 리커창의 죽음을 예견하듯 대비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시 주석의 의중이 아니라면 차이치가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과거 공산당 지도자 중 ‘사망을 당했던’ 예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리커창이 속했던 ‘공청단파’의 대부이자 한때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군림했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다.

2020년 5월27일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과 리커창(오른쪽) ⓒUPI 연합
1982년 전인대 회의에서 덩샤오핑과 함께한 후야오방(왼쪽) ⓒ후야오방추모위원회 제공

리커창 행보와 상반된 시진핑에 대한 반발

정식 명칭이 공산주의청년단인 공청단은 사실상 후야오방이 키운 공산당 전위조직이다. 후야오방은 1949년 공청단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1952년에는 제1서기가 되었고 무려 19년 동안 재임했다. 비록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덩샤오핑과 함께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고난을 당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복귀했다. 그 후 고속 승진을 거듭해 1980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되었고, 이듬해에는 총서기에 선임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첫 공산당 총서기로서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부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중국에서는 경기 과열, 인플레, 부정부패 등 개혁·개방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따라서 1986년 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없이 현대화는 없다”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후야오방은 시위대를 옹호했다. 이런 행태를 보수파가 격렬히 비난하자, 이듬해 1월에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희생양 삼아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후야오방 후임으로는 자오쯔양이 선임되었다. 1989년 4월 중앙정치국 석상에서 발언을 마친 후야오방이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자오쯔양은 즉각 의사들을 호출했다.

그런데 의사들이 들어오는 도중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혀 10분이나 지체되면서 골든타임을 놓쳤다. 톈안먼 사건은 이렇게 후야오방이 급사하면서 촉발되었다. 전국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넘쳐났고,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톈안먼광장에 몰려와서 후야오방을 추모했다. 사실 추모 강도와 깊이를 따지자면 리커창은 후야오방에 비교될 순 없다. 리커창을 향한 인기가 높긴 하지만 후야오방에 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리커창은 10년 동안 총리로 재임하면서 시진핑 주석의 카리스마와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왜 리커창을 이렇듯 추모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리커창의 행보와 상반되었던 시진핑에 대한 반발이다. 이는 팬데믹 기간의 두 사람의 행적을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2020년 1월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우한이 봉쇄되었다. 리커창은 봉쇄 4일 차인 1월27일에 우한을 방문해 현장에 머물면서 진두지휘했다. 그에 반해 시진핑은 코로나19 확산이 완전히 꺾인 3월10일에야 우한을 찾았다. 이렇게 리커창은 코로나19 초기부터 최선봉에 서서 수습했으나, 그 과실을 독식한 이는 오히려 시 주석이었다.

그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코로나19로 인해 3월이 아닌 5월에 개최되었다. 리커창 총리는 침체된 경제와 악화된 민생에 주목했다. 그래서 회의 기간 중 기자회견에서 “중국인 6억 명의 월수입은 겨우 1000위안(약 18만4450원)밖에 안 되는데 이 돈으로는 집세를 내기도 힘들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중국의 심각한 빈곤과 빈부격차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직전 해인 2019년 10월 국경절에 시 주석은 전혀 다르게 말했다. 기념사에서 “중국이 샤오캉(小康) 사회의 건설을 완수했다”고 선언했다.

 

2030세대, 시진핑 지지에서 반대로 돌아서

샤오캉은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리커창의 발언은 그에 대한 반박이라고 여겨질 만했다. 게다가 리커창은 전인대가 개막하기 직전에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노점경제’를 들고나왔다. 누구나 거리에 나와 가판을 차리고 돈을 벌어 경제를 활성화시키자는 의도였다. 규제를 풀어주자 중국인들은 크게 호응했다. 하지만 전인대가 폐막된 지 한 달 만에 관영언론은 노점상의 각종 문제를 비판했다. 실상은 노점경제가 중국의 경기 침체와 빈곤 문제를 부각시킨다는 시 주석의 우려가 투영된 것이었다.

지난해에는 시 주석이 주도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상하이가 장기간 봉쇄되는 등 중국 경제가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5월 국무원 회의에서 리커창은 “방역을 잘하기 위해서는 재력과 물자의 보장이 필요하고 고용과 민생도 향상시켜야 한다”며 제로 코로나 정책을 꼬집었다. 이렇듯 리커창은 팬데믹 기간 내내 경제와 민생을 챙겼다. 중국인들이 실생활에서 피부로 와닿는 행보를 펼쳤던 것이다. 그에 반해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앞세워 대외 영향력 강화에만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중국 2030세대는 이런 시진핑을 열렬히 지지했다. 하지만 3년 동안의 제로 코로나 정책과 미국과의 갈등으로 커지는 경기 침체에 따른 피로감과 불안감이 누적되었다. 그로 인해 지난해 11월말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백지 시위는 2030세대가 주동했고 급기야 “시진핑 하야”까지 외쳤다. 물론 리커창에 대한 추모 열기가 제2의 톈안먼 사건으로 번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전 사회적인 통제와 감시체계를 완벽하게 갖추었기 때문이다. 결국 향후 정국의 향방은 경제 회복과 민생 안정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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